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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박민혁-그 후

그 후

 

 

  오래전부터 나를 미행하며 관찰한 소회는 마냥 슬프다고만 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삶은 자꾸 차악(次惡)의 방향으로만 흐른다. 이리 온. 나는 위로하고 싶다.

 

  꿈에 들린 국숫집에서 나이 든 주인 남자는, 살갑게 마주하는 너와 나의 혀가 텅 비었다 말하고, 나는 발끈한다. 그는 다만 따뜻한 국물을 사발에 더 부어줄 뿐이다.

 

  시 깊숙한 곳에 너를 밀어 넣는다. 의도치 않은 죽음에 휘말려 시체 한 구를 필사적으로 숨기듯이. 너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이제는 도무지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면, 마침내 네 이야기를 시작해도 좋을까.

 

  미사여구 한 줄로 풍경 따위를 요약하는 일은 이제 하지 않는다. 시 한 편을 위해서도 갖은 인프라가 필요하다. 이 무렵 나는 사소한 친절에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겁을 줘 쫓아낸 길고양이가 다시 와있다. 겁도 없이 다가와 내 발등을 핥고, 살을 부빈다. 한참을 망설이다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레 등을 쓸어준다. 함부로 사람 손을 타도 괜찮은지, 그 어린 것이 문득 서러워지고. 고통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고.

 

  언제쯤일까. 양이 너무 많아서 누군가 생을 조금 남긴다든지 그런 날. 나는 나를 여럿 버려 놨다. 생각이 비극에 치우치자 미래가 다 보였다. 마음에는 적산가옥이 몇 채. 미완의 인생 한 편을 본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지……

 

  시를 가둔 새장의 문을 연다.

 

 

박민혁 |2017년『현대시』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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