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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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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방수진-애드리브 애드리브 내가 너의 배경이 되어줄게 넌 마음껏 어지러워지렴 무모해지렴 불을 얻기 위해 자신을 태운 최초의 인류처럼 한 번쯤은 녹아내린 설산 눈가의 주름을 세다 쓱 잠들어버린 케냐 마을의 한 아이가 되어보는 것도 낮은 여름, 밤은 겨울로 이루어졌다는 지구 반대편의 하루를 상상하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시간들과 낯선 인사를 나누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는 내 마음을 무심하게 만드는 것에 익숙해 애써 데워 놓은 음식을 식게 내버려 두고 옷걸이에서 떨어진 옷을 바로 주워 올리지 못해 숨을 참고 죽은 척 해 상처를 바라보며 웃는 것은 나일까 내가 아닐까? 모든 것이 불현듯 타올랐다 한순간 얼어버리는 여름과 겨울의 반복 속에서 빙하는 후렴구 없는 노래를 밤새도록 부른대 나는 종종 노래에 취했지만 햇빛에 흘러내리는 글자..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김영숙-겨울나무 겨울나무 해질녘 홀로 발이 시리다 스산한 길, 가느다란 팔 휘저으며 침묵을 흔드는 바람이 볼을 스치면 바짝 마른 몸 구부려 웅크리고 위태위태한 떨림의 말 알아듣지 못한 곡조를 윙윙윙, 나무는 가여운 생존을 내뱉고 있다 물 흐르듯 사라져가는 계절의 길목에서 눈만 깜박이는 부엉이처럼 가끔 마지막 잎새 하나 떨어질 듯 흔드는 흔들리는 그 모습이 서럽다 엊그제 같았던 푸른 잎들의 속삭임, 텅 빈 벌판에 메아리로 남고 침묵의 늪에 잠긴다 청량한 새들 지저귀는 봄날 기다리며 긴 발톱 뿌리에 감추는 완곡한 겨울나무 김영숙 |2007년 『한국문인』 등단. 시집 「문득 그립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문파문학회 회원, 경기시인협회 회원. 동남문학회 회장역임. 동남문학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서정임-높고 쓸쓸한 방 높고 쓸쓸한 방 돌멩이를 던졌다 검푸른 물이 고여 있는 담(潭) 파고드는 돌팔매에도 한 치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온다 흔들흔들 서로의 얼굴을 맞대며 간격을 좁히는 나무들 흐르지 못하는 담(潭)은 담(坍)이다 어느 순간 문 닫은 방이다 저 깨지지 않는 검푸른 빛의 고요는 어느 찰나 너도 모르게 터져 나온 비명의 농도인가 희석되지 않는 멍은 묘혈이다 세찬 물줄기로 헤쳐 나와야할 고독의 염천이다 태양빛은 서로를 향해 팔과 다리를 뻗을 때 가슴을 밀고 올라오는 것 그 속에서 오래도록 층층 단층의 퇴적의 시간을 쌓는 너는 어느 행성에서 떨어져 나온 운석인가 미증유의 삶을 사는가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저 답 없는 답을 두드릴수록 답 없는 방이 두꺼운 암막 커튼을 친다 더욱 더 흐르지 못하는 높은 담을 키운다..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하상만-나는 나와 함께 걸었다 나는 나와 함께 걸었다 힘들 때 나는 나에게 기대었다 슬플 때 나는 나에게 기대었다 쓸쓸할 때 지루할 때 나는 나에게 기대었다 나는 나에게 기대었다 그게 좋았다 위로도 충고도 내 맘이 아닌 것들엔 기댈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편했다 슬픔도 우울도 나와 견뎠다 하상만 | 2005년 『문학사상』등단. 시집「간장」「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 제9회 김장생문학상 대상, 제9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문신-누군가 페달을 밟아대는 저녁 누군가 페달을 밟아대는 저녁 하루쯤 휘청, 하고 그대로 주저앉아도 좋으련만, 누군가 묵묵하게 페달을 밟아대는 저녁이다 물기가 마르지 않아 심심한 목덜미를 기웃거리며 아내는 외출을 준비하고, 식탁 위에 놓인 수저 한 벌이 흐리다 이런 저녁이면 자주 흘려놓던 한숨도 부질없다 부질이라…… 이 말에는 쇠에 불을 먹여야 단단해진다는 대장장이의 통찰과 노동의 역사가 있다는데, 아무런 생각 없이 또 일없이 맞이하는 저녁이야말로 부질과 먼 일이다 그럼에도 밥그릇을 비우고 흘린 밥알을 훔치고 수저를 씻어 수저통에 가지런하게 눕혀놓는다 이렇게 살아보니 사는 일만큼 허술한 짓이 또 있을까 싶다 캄캄해지면 불을 켜는 일이나 환한 불빛 아래 늦도록 꼼지락거리는 일이 하루를 살아가는 일 같아서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쉼 없이 하루의..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김병호-과수원 과수원 내일이면 터질까 싶은 물집 저녁이 되지 못한 구름 그이들의 곡절은 얼마나 다정할까 손을 내밀면 녹아지는 나무가 옮기지 못한 마음도 있겠다 태풍이 지나는지 능선의 필라멘트는 낱낱이 터지고 대신 나무도 빈집도 당신의 이름을 닮는다 숨을 곳이 구름뿐이어서 저녁이 오는 동안 바라보는 일이 전부인 마음도 있겠다 눈물 얼룩 서늘한 발등과 마른 입맞춤과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고백이 있어 들판도 아니고 집도 아닌 무작정 겨울뿐인 이월의 과수원 얼마나 멀어야 구름이 될까 얼마나 저물어야 꽃이 될까 구름에 묻힌 속눈썹 하나 잘 마르지 않는 눈빛 하나 발자국 하나 없이 당신을 데려갈 수 있을까 같이 어디 가자는 말도 없는 이월의 과수원처럼 김병호(金炳昊)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달 안을 걷다」「밤..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송미정-우물은 끝내 열지 않았다 우물은 끝내 열지 않았다 기억의 길마저 흐려서 서성거리는 내 앞에 유일한 중심은 뚜껑이 덮여있는 우물이었다 붉어진 마음이 가는 주소지를 늦도록 더듬고 있으면 저녁노을이 살포시 차렵이불로 펼쳐지던 뒷동산도 몸을 낮춰 마을로 내려왔다 버려진 것도 모르고 삭은 기둥으로 견디고 있는 폐가 그가 쌓아놓은 적막을 먼 길 가던 바람이 쓰다듬고 있었다 옛사람이 오거나 말거나 마을은 낮잠이 너무 길고 이제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길목마다 글썽이는 이름들 주워 담고 고아처럼 돌아서는 길 오래 묵은 슬픔을 출렁거리다 간신히 다스렸을 우물은 끝내 열지 않았다 송미정 |2002년 『문학시대』 시 등단. 2015년 『한국수필』 『수필과 비평』 수필 등단. 시집 「소소한 일」 외 4권, 수필집 「가끔은 나도 흔들리고 싶다」외 2권...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이영주-삶의 계략 삶의 계략 아무도 없는 데, 전등이 켜졌다, 누구세요? 라고 묻고, 누군가는 웃는다, 이 가벼운 입김은 뭐지, 멀리서, 누군가가 현관을 보고 있다, 누구세요? 발은, 방으로 들어간다, 이 문턱은 깊게 훼손되어서, 아무나 들어올 수 있어, 아무도 없지만, 누구나 들어와서, 뭉개진 발을 올려놓지, 멀리서, 진물이 흐르는 문턱을, 누군가 보고 있다, 조용히 여기까지 걸어왔네, 아무리 가벼워도, 절룩인다 절룩여, 화농이 부풀어 오르고…… 아무도 없는데, 이런 권태감은 무엇이지, 매번 문턱이 있었고, 닳아 없어졌고, 수 만 개의 입김이 둥둥, 그때마다 하급신은 바닥인 인간보다 더 힘이 없지, 전등은 켤 수 있지만, 짓눌러진 발이, 문턱에 걸쳐, 흐르고 있지, 오랜 시간, 나는 걸어오며 갱신되었습니다, 너무 뜨거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