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페달을 밟아대는 저녁
하루쯤 휘청, 하고 그대로 주저앉아도 좋으련만, 누군가 묵묵하게 페달을 밟아대는 저녁이다 물기가 마르지 않아 심심한 목덜미를 기웃거리며 아내는 외출을 준비하고, 식탁 위에 놓인 수저 한 벌이 흐리다 이런 저녁이면 자주 흘려놓던 한숨도 부질없다
부질이라……
이 말에는 쇠에 불을 먹여야 단단해진다는 대장장이의 통찰과 노동의 역사가 있다는데, 아무런 생각 없이 또 일없이 맞이하는 저녁이야말로 부질과 먼 일이다 그럼에도 밥그릇을 비우고 흘린 밥알을 훔치고 수저를 씻어 수저통에 가지런하게 눕혀놓는다 이렇게 살아보니 사는 일만큼 허술한 짓이 또 있을까 싶다 캄캄해지면 불을 켜는 일이나 환한 불빛 아래 늦도록 꼼지락거리는 일이 하루를 살아가는 일 같아서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쉼 없이 하루의 페달을 밟을 것이고
페달에 걸린 저녁이
슬슬슬슬 감겼다가 슬슬슬슬 풀려나가기도 할 것인데
언제 한 번은 크게 쓸려 가버릴 것만 같은 저녁처럼 아내의 외출이 부쩍 잦아지고 있다
문신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물가죽 북」「곁을 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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