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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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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김성희-이상하다 이상하다 입 안에 설탕이 녹듯이 어젯밤 내린 비는 흔적 없다 물은 조작이나 은폐를 모르는 순수 꽃들 또한 향기로는 상처를 증명하지 못하니 유야무야 내적 독백에 젖은 물빛이다 그러니 감정은 닥치고 영혼은 피어나라 아침은 눈치 볼 것도 없는 새날이다 비를 숨겼다기보다는 비는 어디론가 흘러간 것 알잖아, 의식의 흐름은 매력적인 전개인 것을 비도 꽃도 상처도 불쑥 드러낸 현상일 뿐 그러니 용서처럼 따뜻한 햇살에 깨어나라 용서... 쉽지 않지만 어려울 것도 없는 용서... 당신이 아니라 나를 위해 다만 나무같이 오래 서 있는 연습이 필요하다 연탄이 타버리고 나면 무너질 듯한 아홉 개의 성에는 창백한 이야기가 남지 나는 오직 두 개의 눈동자에 타고 남은 잿빛 영혼 그러니 감정은 닥치고 커피와 논의할 게 많은 아침을..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유이우-부드러운 거리 부드러운 거리 미소짓는 마음만 둥근 거라던 사랑하는 골목이 강박을 약간 치우면서 원하는 그 느낌으로 살기 위하여 되돌아 와서는 얼마간의 새로운 세계들을 계속 등 뒤로 보내는 거야 유이우|2014년 중앙신인문학상 등단. 시집「내가 정말이라면」.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조영숙-곁에 곁에 봄 빛 더듬어 걸음 멈추지 않으니 잎 그늘 사이로 바람의 빛깔 일어선다 다 가진 듯 외진 한 길 얇은 바람에도 흔들림 없는 꽃 잔디 얼굴 내밀고 야위게 발돋움하는 가로수는 낮게 앉은 새들의 입맞춤 받으며 고개 끄덕인다 오후 햇살 길게 남아 투명한 물방울 머금고 출렁이는 파도가 된다 조영숙 |2012년 계간 『문파』 등단. 문파문학회 회원. 호수문학회 회원.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장수진-무원 다방 무원 다방 커어피 테이블 테이블 보 원하고 원망하고 홀짝이고 훌쩍이고 얼룩진 물기 누가 욱 깨문 듯 이 빠진 찻잔 싱크대의 젖은 국화들 누군가 다녀간 무원 밀양에서 전도연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카메라는 전도연을 본다 무원은 다방 앞에서 계단 입구를 보는데 무원은 영화 본 적 없고 무원은 소설 가끔 시를 보는데 하늘이 더러워도 맑아도 저 아래는 쥐가 드글드글할 것 같은데 이상하지 않다 그런 세상 쥐가 프로이트보다 인간의 무의식에 대해 더 많이 안다는 그것은 무원의 초자아일까 무원은 주인일까 손님일까 아들 아들은 다방을 떠날 것이다 전도연 아들은 죽었고 도연은 신 새끼를 찾아 사지를 찢어발겨야겠는데 무원은 계단을 내려간다 녹슨 파이프와 절단된 파이프와 찬장에 구두와 찻잔에 둥둥 뜬 틀니 종교란 거북한 것들만 ..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박수중-배달의 민족 배달의 민족 환웅熊 ‘배달倍達의 민족’이 어느 새 치킨鷄 ‘배달配達의 민족’으로 변용되더니 팔렸다 대동강 물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異민족에게 팔려버렸다 하늘위 상징을 땅위로 끌어내려 세속화世俗化하는 현대판 우화寓話의 리얼리티 쇼. 박수중 | 2010년『미네르바』등단. 시집「클라우드 방식으로」「크레바스」「꿈을 자르다」등. 한국문학인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김옥자-폐허를 지키다 폐허를 지키다 하늘 한 자락 펼쳐 놓은 적막 속 기울고 주저앉은 기둥들이 시간의 발부리에서 물컹하게 뽑혀 주춧돌마저 나른하게 물러앉은 자리 바람은 무시로 한 편의 아련했던 문장을 꺼내어 세상 속으로 펼쳐 놓는다. 응달이 키운 푸른 이끼들이 청태처럼 터 무늬에 새겨졌던 흔적을 덮어오듯 목이 가느다란 제비꽃 발목이 긴 괭이 풀, 한쪽에서 살금살금 궁금하다 낯선 곳으로부터 날아든 질경이 씨앗 제 영역을 넓히며 폐허와 땅따먹기를 하고 민들레 겹씨들이 끈질긴 집념으로 낮은 포복에서 일어서며 허공 속으로 폐허의 부서지고 깨진 모서리 발려내고 있다 한 낮의 무료함이 잡목 무성한 우듬지에 걸터앉을 즈음 한 종(種)의 배열이 주춤주춤하고 한 시대의 역사가 지면으로 옮겨지는 동안 생·멸을 반복하는 숲의 겨드랑이에서 잔가지..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김연아-만트라 만트라 나의 신은 매번 요절했다 얼음 위에서 떨고 있는 슴새의 발처럼 나는 밤마다 입에서 은색의 문자를 낸다 저 바람 속에는 눈물을 말리는 눈들이 있다 -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네가 외우는 문자이다 밤의 도로는 비어있고 한 사내가 커다란 물고기를 안고 간다 물고기의 눈물이 그의 발자국 위로 떨어질 때 그 입은 벌려진 채 고정되어 있다 누군가를 부르다가 멈춰버린 것처럼 물고기에서 새에게로 전송되는 밤의 만트라 내가 바라보는 그가 나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시간에 나는 생각한다 그의 피부로, 그의 허파로 내 몸은 그의 기억이다 그를 제외하면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얼굴을 얼마나 많이 삼켜버렸는지 나의 몸은 그림자로 가득 차 있다 창백한 불꽃 속으로 기울어지는 작은 머리가 있다 깊고 어두운 숲의..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서선아-소 도살장 끌려가듯 소 도살장 끌려가듯 하늘은 구름을 잔득 안고 울기 직전 길은 휴가 떠나는 차들로 막히고 도착한 병원 주차장은 만차 소 도살장 끌려가듯 약속된 시간의 고삐가 나를 투석실로 끌고 가니 도살장 책임자 칼 대신 굵은 주사바늘 들고 나를 반긴다 팔을 걷어 지렁이 붙은 듯한 혈관 내어놓고 눈을 감는다 호박에 침놓듯 푹 들어오는 바늘의 전율 온몸이 통증10의 수치에 오른다 살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내일을 기약하는 오늘 * 통증10 : 의학적으로 최고의 통증을 말한다 서선아 |2007년 계간 『문파』 등단. 시집 「4시30분」 「괜찮으셔요」. 한국문인협회 회원. 문파문학회 회원. 문파문학상, 동남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