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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김옥자-폐허를 지키다

폐허를 지키다

 

 

하늘 한 자락 펼쳐 놓은 적막 속

기울고 주저앉은 기둥들이

시간의 발부리에서 물컹하게 뽑혀

주춧돌마저 나른하게 물러앉은 자리

바람은 무시로 한 편의 아련했던

문장을 꺼내어 세상 속으로 펼쳐 놓는다.

응달이 키운 푸른 이끼들이 청태처럼

터 무늬에 새겨졌던 흔적을 덮어오듯

목이 가느다란 제비꽃

발목이 긴 괭이 풀, 한쪽에서 살금살금 궁금하다

낯선 곳으로부터 날아든 질경이 씨앗

제 영역을 넓히며 폐허와 땅따먹기를 하고

민들레 겹씨들이 끈질긴 집념으로

낮은 포복에서 일어서며

허공 속으로

폐허의 부서지고 깨진 모서리 발려내고 있다

한 낮의 무료함이

잡목 무성한 우듬지에 걸터앉을 즈음

한 종(種)의 배열이 주춤주춤하고

한 시대의 역사가 지면으로 옮겨지는 동안

생·멸을 반복하는 숲의 겨드랑이에서

잔가지 물어다 제 집 보수 하는 까치처럼

지구 한 귀퉁이를 개간하며 태평성대를 꿈꾸는

완고함이 키운 저 청정한 몸짓들

 

잠시 짓무른 눈을 훔치자

눈이 환하다

 

 

김옥자 |2009년 계간『문파』 시 등단. 202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

시집 『가급적이면 좋은』『꽃 사이사이,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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