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를 지키다
하늘 한 자락 펼쳐 놓은 적막 속
기울고 주저앉은 기둥들이
시간의 발부리에서 물컹하게 뽑혀
주춧돌마저 나른하게 물러앉은 자리
바람은 무시로 한 편의 아련했던
문장을 꺼내어 세상 속으로 펼쳐 놓는다.
응달이 키운 푸른 이끼들이 청태처럼
터 무늬에 새겨졌던 흔적을 덮어오듯
목이 가느다란 제비꽃
발목이 긴 괭이 풀, 한쪽에서 살금살금 궁금하다
낯선 곳으로부터 날아든 질경이 씨앗
제 영역을 넓히며 폐허와 땅따먹기를 하고
민들레 겹씨들이 끈질긴 집념으로
낮은 포복에서 일어서며
허공 속으로
폐허의 부서지고 깨진 모서리 발려내고 있다
한 낮의 무료함이
잡목 무성한 우듬지에 걸터앉을 즈음
한 종(種)의 배열이 주춤주춤하고
한 시대의 역사가 지면으로 옮겨지는 동안
생·멸을 반복하는 숲의 겨드랑이에서
잔가지 물어다 제 집 보수 하는 까치처럼
지구 한 귀퉁이를 개간하며 태평성대를 꿈꾸는
완고함이 키운 저 청정한 몸짓들
잠시 짓무른 눈을 훔치자
눈이 환하다
김옥자 |2009년 계간『문파』 시 등단. 202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
시집 『가급적이면 좋은』『꽃 사이사이,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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