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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1년 여름호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남수우-오렌지 빛 터널

오렌지 빛 터널

 


내게도 허락된 창턱이 있었다 날마다 그것을 딛고 넘어오는 것은 빛 다음에 어둠 그리고 다시 빛 연기가 자욱한 날에도 둘 중 하나를 기다렸다 어둠 다음에 빛 시간이 흐를수록 커피 잔은 식어간다 커피를 다 식히면 시간도 멎을까요 빛이 넘어 간단다


저녁 아래 나는 잠들어 있었다 잠 아래 내가 촛불을 태운다 맞은편 창가에는 늙은 사람이 턱을 괴고 앉아 들릴 듯 말 듯 불 아래서 중얼거리고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창턱의 다알리아는 붉은 잎을 하나씩 떨어뜨렸다 시간이 속을 태우기도 하나요 빛이 넘어갈 뿐이란다 꽃잎이 검붉게 말라갈 무렵 나는 잠에서 깼다 흰 천장 아래로
고작 이십 분이 흘러 있었다


사람들은 친절했다 나는 딸기 두 송이를 훔쳐 달아났다 집 앞 문턱을 넘으면 으깨진 딸기즙이 두 손 가득 흘렀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나는 손을 씻었다 내가 달아난 거리에서 사람들이 손차양을 한 채 창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날은 창턱 아래서 친구들이 쑥덕이며 지나가고 어느 날은 녹색 옥상들이 저녁 속으로 가라앉았다 또 어느 날은 옛날 사람들이 모퉁이에 앉아 달력을, 때론 일기를 한 장씩 넘겨보고 있었다


그리고 문을 닫는 사람 하나 날마다 현관을 지나 날마다 하얀 차에 올라 날마다 벚나무 내리막길을 굴러갔다 곧 오신대, 입천장을 두 번 두드릴 때마다 동생이 웃는다 하얀 물감을 긁어내고 비죽 고개를 내밀던 저녁 어느 날은 가로등 아래 내가 그 집을 가리키고 있었다 창가에 턱을 괴고 있던 둥근 실루엣이 누구인지는 모르고 떠났다

 

열차가 지날 때마다 얼굴들이 보였다 맞은편 선로 위에서 반대쪽으로 미끄러지던. 네모진 차창마다 들이찬 내가 손 흔들며 오래 멀어져 갔다 내가 쥐어준 쪽지 말미에는 한글이 섞인 날짜들이 빽빽이 적혀 있었고 나는 하루씩 순서 없이 읽으며 긴 오렌지 빛 터널을 지났다
빛과 어둠 어둠과 빛 사이에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수우 | 202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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