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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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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김복희-괴물보다 악몽 같은 괴물보다 악몽 같은 택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달원이 보낸 배송 안내 문자를 보고 집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이불을 덮어쓰고 있었다 그런 꿈속에 있으려면 옷을 갖춰 입어야 하지 누가 봐도 옷처럼 보이는 옷을 마련해야 해, 피곤했다 그 옷, 아주 아름다운 저택을 상속받는 꿈 울창하고 고요한 숲속 마을을 내려다보는 멋진 멋졌던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멋있게 택배를 들여 놓고 이불을 벗어 불 속으로 조심스럽게 던졌다 죽은 사람에게도 옷이 필요한가 죽으면 사람이 아닌가 누구도 벗은 채로 떨면서 죽어서는 안 된다 불이 할 일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김복희 | 201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희망은 사랑을 한다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정영미-고양이 등 쓸어내리는 오후 고양이 등 쓸어내리는 오후 고양이 등 쓸어내리다 눈물길을 보았다 손끝에 와 닿는 여린 숨결 활처럼 굽은 등을 따라가면, 몸을 돌돌 말고 앉아있는 너의 세계를 읽고 싶다 오늘 나는 젖은 문장으로 앉아 너에게 무릎의 언어로 말한다 모쪼록 거친 내 손끝에 걸려 아프게 기억되지 않기를 닫힌 마음은 좀체 열리지 않고 너의 눈빛 미동도 없는데 바람은 부드러운 입술로 다가가라 하는데 먼저 내민 손이 자꾸만 뒷걸음질 친다 저 깊은 우물의 행간 속 코끝 차가운 입맞춤으로 불러봐도 대답 없는 침묵뿐이다 서로를 물고 뜯고 핥으며 지낸 시간의 무게가 너무 깊어 지독한 허기가 찾아든 낮달 속 너의 세계를 가만히 건너다본다. 정영미 | 2012년 『미네르바』 등단. 시집 『밥에도 표정이 있다』. 동서커피문학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박은정-부두인형 부두인형 욕조에 인형을 빠트린다 목을 조르자 몸뚱이가 튕겨 올라온다 아직은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게 용서의 이유라도 될 것처럼 감자튀김을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면 술잔은 이유 없이 찰랑거렸고 나는 어느새 우리의 자리에 앉았다 이 환란의 시대에 태어난 걸 축하해, 한 손에는 나를 닮은 부두인형을 안고 촛농이 떨어진 케이크를 자르면 누군가 나의 얼굴에 긴 바늘을 꽂는다 아직은 살아서 행복한 거지? 나의 멱살을 잡던 눈은 뜨거웠고 아프지 않아도 아팠던 날들과 알고 싶지 않아도 모르는 미래가 지겨웠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끝이 나는 걸까 물 위로 떠오르는 인형이 있다 나를 찌르던 손이 나를 건져 올린 아직은 죽지 마, 네 마음이 버둥거리잖아 몸속의 피가 다 빠져 나간 모습으로 매일을 선물 받는 기분을 네게 말할 수 ..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임정남-강렬한 충동 강렬한 충동 숨어 있는 태양은 보이질 않지만 소문처럼 태풍은 얼얼하게 큰 소리로 지나갔다 고양이 눈으로 발톱 세워 땅속으로 박고 서서 종종걸음으로 숨 가쁘게 달려 온 이 시간 오만과 독주를 벗어나 따뜻한 협치를 해야 하는 여당과 야당처럼 풀과 나무와 새들에게도 꿈에도 그리운 옛날 우리 집 인물 좋던 dog에게도--- 태양아래서 구름을 찾지 말고 푸른 나무에 열매만 따지 말고 도처에 앉아 있는 자연에게 고개까지 숙이면서 배울 차례가 하! 지나기도 했지만 어쩌랴! 지구를 사랑했던 날들처럼 머지않아 이별도 치열하게 눈 동그랗게 뜨고 , 줄줄 줄--- 홀로 마시는 술맛같이 쓰디쓰지만 달빛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고 있을 그대 생각하면 온 자연에게 미안해서 주먹으로 지르고 싶은 마음으로 혼자 우는 찌르레기, 가난하..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김옥자-벙글다를 놓고 벙글다를 놓고 미망 속 빛으로 닿아 확장되고 싶은 염원 꿈이 아니었지 소쇄한 정신을 베껴 쓰는 혼곤함 속에서도 설한이 지은 눈물 잠재우며 유려한 빛깔로 탄생하고픈 갈망이었지 단단하게 잠겨있던 一家의 문을 연다는 건 깊고 먼 데서 퍼 올린 고뇌까지도 끊임없이 매만지며 숙의의 시간을 가졌다는 거 모체에서 발원된 저릿한 피돌기 유선을 따라 돌고 돌아 젖꽃판이 포문을 열듯 지극함으로 닿을 때 응축되었던 무늬 기지개를 펴며 또 다른 이름으로 지칭되어질 끊임없이 써 내려갈 문장 김옥자 | 2009년 계간 『문파』 시 등단. 202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 시집 『가급적이면 좋은』 『꽃 사이사이, 바람』. 수필집 『아버지 게밥 짓는다』.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전옥수-카랑코에 카랑코에 겨울은 못 넘길 줄 알았어 마른 허리로 지지대를 기댈 때 조롱하듯 참 못났다 했어 누런 표피들 청소기 소음으로 훅 흡입하고 대수롭지 않게 돌아섰지 흐르다 휘어진 줄기 곧추세운 넌 초록을 틔웠다고 나지막이 말했지 도무지 귀담아 듣지 않았어 옷이 자꾸 헐거워진다며 밥을 많이 먹어야겠다고만 했어 톱니 같은 몇 닢 초록이 묵직해지던 날 몸을 더 낮추려나 봐 어쩜 그만해 제발 허리가 더 굽어진다니까 두 볼이 홍옥처럼 반짝이던 널 갤러리에서 만났지 쓰라린 볼을 타고 짙어진 봄이 흐르고 있었어 까매진 손톱 밑 쑥 향 진하게 밴 아린 봄이 내게로 왔어 봄이야 네가 봄이였어 전옥수 | 2008년 계간 『문파』 등단. 시집 『나에게 그는』. 현 『문파』 편집위원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이동욱-짐작할 뿐이야 짐작할 뿐이야 기린이 프린트된 냅킨은 처음이야 당신은 냅킨을 만지며 말했지 손가락 사이에서 비치는 것은 무엇일까 기린은 얼룩이 전부야 수풀에 몸을 낮춘 맹수와 초원을 적시는 스콜 한낮의 온순함이 섞여 있는 곳으로 우리, 아는 걸 이야기하자 이를테면. 말을 마치고 당신은 냅킨을 반으로 접었다 우아함은 어디서 오는가 길게 목을 늘이며, 여기서 거리를 내려다보면 기린의 시선쯤 될까 사람들은 얼마나 멀리 있을까 하나같이 보잘 것 없구나 여기서 보면,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기린에 대해 이야기하자 냅킨을 한 번 펼치고, 다시 펼쳤다 기린은 그대로인데, 초원은 자꾸 커졌다 커지면서 얇아졌다 차라리 모두 이리로 불러와 함께 있으면 뭐라도 되겠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미소는 금세 사라지고 주름이 남았다 당신은 어디까지..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백미숙-지금도 그냥 지금도 그냥 잠자듯 눈을 감고 누워있어도 멍하니 눈을 뜨고 앉아 있어도 나는 알고 있다 당신이 내 곁을 떠났다는 것 그러나, 오늘도 믿을 수가 없다 지금도 그냥 그 의자에 당신이 앉아 있고 지금도 그냥 그 침대에 당신이 자고 있다 사시사철 함께 걷던 아사아 공원 산책로를 맥 놓고 걷는다 걱정하지 마 나는 45도 열사의 중동 모래땅에 수백 채의 집을 짓고도 끄떡없이 살아 돌아온 사람이야 당신만 아프지 마 나는 강철 같은 사나이야 강아지처럼 웅크리고 앉아 지금 그의 말소리를 듣고 있다 까치가 까깍 까까깍 지껄이며 머리 위를 날고 있다 약속은 뜬구름처럼 허망한 것이라고, 멍청하게 일어섰다 앉는다 당신은 이미 내 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백미숙 | 2005년 『한국문인』등단. 계간문파문학회 명예회장, 한국문인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