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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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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장철문-발자국 발자국 엔가레 세로! 할머니와 내가 고원을 가로지르던 곳 내가 발가락 사이로 밀고 올라오는 진흙이 간지러워 웃었을 때 할머니가 빙그레 웃고, 어머니가 따라 웃고, 이모들이 웃고, 아버지들이 웃고, 누이들이 가젤 똥처럼 때글때글 웃고 발가락 사이에 간지러움을 만들려고 내가 진흙에 발자국을 꾹꾹 찍고 다녔고, 누이들이 따라 했고 웃음판 속에 우리는 발자국을 찍었고 춤을 추었고 할머니가 노래 불렀고, 아버지들이 춤을 추었고 이모들과 어머니가 함께 추었고 고원이 끝나는 곳에서 무릎 다친 가젤을 만났고, 그날 밤 가젤이 우리 몸속으로 들어왔고 우리가 가젤의 무릎 속으로 들어갔고 엔가레 세로! 거기 할머니와 어머니와 이모들의 발자국이 아버지들과 내 발자국이 누이들의 발자국이 그렇게도 많이 남아 있었다니! 그 발자국..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이대흠-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잘려나간 도마뱀의 꼬리는 자라서 뱀이 되지 않습니다 그 골목에서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은 빌어먹을 놈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시멘트벽에 문을 개발하지 못해서 발자국을 남기는 기술만 익혔습니다 발차기를 할수록 하늘은 높아졌지요 문득 벗겨진 운동화가 전봇대에 걸렸을 때 새가 되고 싶었습니다 겨드랑이 밑에 날개가 돋아도 땅바닥에 버려진 음식 찌꺼기에는 입을 대지 않겠습니다 대부분의 저주는 자기를 향해 돌아오고 마스크를 쓴 채 나는 골목의 주인이 되기 위해 배회했습니다 그러려고 한 일을 후회한 척 하는 건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말은 몸체에서 떨어져 나간 도마뱀 꼬리 같습니다 파닥이다가 바람이 될 것입니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누군가는 손가락을 잃고 또 누군가는 터진 고추장 ..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이정록-첫날 첫날 타이어에 낀 돌 세 개를 빼냈습니다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하나는 멀리 날아갔습니다 반쯤 닳아버린 잔돌 두 개를 민들레 꽃그늘에 가만 내려놓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끌려 왔겠지요 돌의 배를 맞대어 주니 기어코 만난 연애 같습니다 바퀴가 생기기 전부터 오늘이 준비됐던 걸 알았다면 부서지고 망가지는 통한의 길을 고마워했을까요 오늘은 타이어에 낀 잔돌을 뽑아냈습니다 하지만 풀밭 어딘가로 날아간 나를 찾지 않기로 합니다 오래된 나를 퉁겨낸 작디작은 내가 홀로 맞는 첫날이니까요 몸속 깊은 곳에 박혀 있는 상처투성이 돌을 빼내어 풀밭에 내려놓을 때마다 나는 첫사랑을 발명하니까요 이정록 |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동심언어사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정말』 등. 박..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이인원-절교 절교 보라가 노랑으로 변한 걸까 노랑을 보라로 봤던 걸까 한때 내 눈엔 오직 보라뿐 네 혈관에 흐르는 파랑과 빨강까진 알아채지 못했던 것 환한 웃음에 감춰진 질투를 깜깜 몰랐던 것 맞지도 않은 꽃말 따윈 믿지 않았어야 했다 짙은 향기에 숨이 막혔다 궁금해 한 적 없었지만 파종도 않고 물 한번 안 주었지만 꽃밭 한 구석에 핀 애기팬지꽃 한 송이 노랑은 보라만 알았거나 보라는 노랑을 몰랐거나 반은 보라, 반은 노랑 극과 극의 개성을 뛰어넘은 자칫 촌스러울 수도 있는 두 가지 색의 자연스런 조합 작은 꽃잎에 사이좋게 엉덩이를 들이민 같음과 다름 관심과 무관심 우린 서로 동색同色이라 착각하고 동석同席했던 걸까 질긴 엉덩이만큼 펑퍼짐해진 실망과 잦은 오해는 한 방석에 도저히 같이 앉아 있을 수 없게 됐고 불가근불..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이경림-여기 여기 거기 꽃삽 없어요? 그가 소리쳤다 꽃은 있는데 삽은 없고 . 내가 빈정거렸다 여기, 여기요 그가 다시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물었다 여기… 여기이… 소리가 길게 휘어지다가 사라졌다 아무리 둘러봐도 없는 여기가 사방에 숨어 있었다 박하분 같은 햇빛 속에 죽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여기 보이지 않나요? 여기가 또 불렀다 여기는 얼굴이 없었다 여기는 팔다리도 없고 여기는 모가지도 없고 머리칼도 없고 젖통도 없는데 여기가 사방에서 불렀다 그러나 여기의 눈빛 잠깐 스친 것 같고 벙어리 휘파람새 같은 그것 몰래 지나간 것 같고 이경림 | 1989년 『문학과 비평』 등단. 시집 『급! 고독』 외 6권. 시론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산문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송재학-풀쐐기에 쏘였을 때의 민간요법 풀쐐기에 쏘였을 때의 민간요법 마당에 잠시 서있는데 벌써 가렵다 풀쐐기와 풀쐐기 너머라는 자극이다 풀의 섬모운동은 적의와 풀잎을 닮아 파릇하고 뾰족하겠지 석유나 식초, 침, 된장, 오줌 등을 바르기도 한다는데, 민간요법까지 떠오르다니 두드러기가 버릇이 되는가 보다 모든 좋은 일은 과거이니까 풀잎들은 뒷모습이 없지만 지금 초록색에 풍덩 몰입한다 이 마당 구석에도 작고 어두운 유폐의 별자리가 웅크리고 있다는 것, 풀숲을 유린하는 방상시에게 풀잎이라는 기척을 알리면서 속삭인다는 것, 그게 풀의 들숨이라고 생각하고 가려운 부분을 풀잎에게 보여주었다 나 때문에 가렵다는 풀의 발자국이 보였다 송재학 | 1986년 『세계의 문학』 등단. 시집 『푸른빛과 싸우다』 『검은색』 『슬프다 풀 끗혜 이슬』 등. 김달진 문학상..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장원상-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한강 변에서 동양하루살이를 만났습니다. 깨끗한 물가에 살며 초록색 날개를 가지고 있어 ‘팅커벨’이라고 불리는 곤충. 3일 정도의 일생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며 날 보고 깨끗하게 살라 합니다. 욕심 버리라 합니다. 비우고 또 비우라 합니다. 이것저것 재며 버리지 못해 자꾸만 주눅 들게 합니다. 그런데 이 곤충도 죽으면 악취 풍긴다 합니다. 욕심 많은 나와 별 다를 바 없다 합니다. 다행입니다. 참 다행입니다 장원상 | 1983년 『현대시학』 초회 추천 받음(추천자: 전봉건 선생님). 2000년 『시문학』 등단. 시집 『나비를 잡는 법』.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김백겸-개양귀비는 여름의 숲길에 피어있다 개양귀비는 여름의 숲길에 피어있다 개양귀비는 세월의 퀼트quilt에 수놓은 부귀공명이 십장생 자수처럼 영원하길 바란 늙은 학인의 꿈처럼 피어있다 개양귀비 저편에 있는 지옥의 힘이 판도라 상자처럼 열리면서 옥타브가 다른 세상의 풍악이 바람결에 들려온다 개양귀비가 공空으로 기초화장을 하고 색色으로 색채화장을 하니 마야maya 홍루紅樓가 만리장성 산책가가 오솔길의 푸른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니 사방에 요염한 꽃향기 개양귀비는 존재의 필사적인 유혹으로 탄생과 죽음을 위한 노래를 바람의 수금竪琴 반주와 함께 부른다 태양과의 섹스와 오르가즘에 취해 있는 붉은 꽃잎의 개양귀비는 노래한다 흰 머리가 억새풀처럼 무성하고 두 눈은 마른명태처럼 말라 병자의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몽상 학인이여 당신이 공부한 진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