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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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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김남호-지구에 처음 온 짐승처럼 지구에 처음 온 짐승처럼 설사는 급하고 화장실은 보이지 않고 지옥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다급할까 지옥에서 오는 길이 이렇게 몸서리칠까 허리는 뒤틀리고 다리는 꼬이는데 문득 밟히는 개똥 한 무더기! 아, 이 똥의 주인은 이미 해탈했겠구나 온몸이 괄약근이 되어 전생의 업까지 깨끗이 비웠겠구나 말아 올린 꼬리 밑으로 지옥의 입구를 환히 드러내놓고 사거리 빨강신호등 아래를 유유히 건넜겠구나 무단으로 건넜겠구나 보란 듯이 보란 듯이 불법不法뿐인 세상을 똥개처럼 개똥처럼 건넜겠구나 불법佛法으로 건넜겠구나 도대체 나는 지구의 어디에 쭈그리고 앉아야 맘껏 나를 쏟아버릴 수 있을까 신발에 튄 나를 가로수 밑동에 스윽 문대고는 저 횡단보도를 무단으로 건널 수 있을까 무단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똥을 한 번도 참아본 적이 없..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장의순-초파리와의 전쟁 초파리와의 전쟁 하루가 멀다하고 음식 찌꺼기를 버리는데도 초파리는 어느새 식구를 불린다 스프레이를 뿌리고 전자 파리채를 휘둘러 따다닥 따다닥 불꽃놀이를 하는데도, 어떻게 부화하는지 알 길이 없다 죽은깨 같이 작은놈이 눈 코 입이 다 달린 모양이다 날개가 있으니 가벼이 난다 밤이 되면 쓰레기통을 흔들어도 가만히 있다 어두움까지도 알고 있는 게다 고 작은 것이 입 닿은 컵 언저리를 귀신같이 알고 붙는다 귀신이 고렇게 작을려고, 아니다 귀신은 초파리보다 작아 보이지도 않지만 인간의 마음속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기에 더 무섭다 그는 善했다가 惡했다가 변덕을 부린다 그는 패스포트도 없이 우리의 마음속을 넘나들기도 한다 몸 가벼이. 장의순 | 2002년 『문학시대』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안차애-개, 너머 개, 너머 산 너머, 개가 있어요 개밖에 모르는 개, 개에만 골몰하는 개가 있어요 개 옆에는 상추와 치커리가 자라고, 파랗고 빨간 고추를 딴 뒤에는 무와 배추를 심는 농장이 있어요 농장 위로 구름이 떠가고 울타리 너머 카페의 커피향이 후각을 흔들어도 개는, 개만 하고 있어요 개만 뚫고, 개만 파고, 개의 콧등만 지나고 있어요 하루치 야채를 딴 사람들이 돌아가고 농장 주인의 차가 떠나도 산 너머, 개가 있어요 저녁보다 검은, 개가 있어요 제 눈빛의 검정에 갇힌 개가 제 꼬리의 검정을 뱅뱅 돌아요 맴돌수록 졸아드는 검정처럼 산 너머, 개가 어둠의 배경이 되고 있어요 저물녘의 검정, 너머 발자국의 검정, 너머 반경 1미터의 검은 줄 너머, 개가 안차애 | 200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치명적 그늘..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휘민-적도 적도 어젯밤에 배는 바람이 불지 않는 곳으로 들어섰다 해수면에 고여 있던 미열이 어둠 속에서 이마를 짚으며 다가왔다 아침을 먹은 뒤에는 갑판에 나와 바람을 기다렸다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다가 두고 온 얼굴과 쓰다 만 편지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당신과 나는 서로의 반대편에 머물 뿐 가까워지지 않는다 점이지대를 추가하면 지도가 바뀔 수 있을까 물결 위에 떨어뜨린 한숨으로 본초 자오선을 흔드는 상상을 해본다 아주 가끔 물속에서 눈동자가 붉은 열대어들이 튀어 올랐으나 바다는 잠잠하다 불안은 미래의 편이어서 나는, 다만 오지 않은 내일을 기다릴 뿐이다 날짜 변경선에 발이 묶여 있으니 달력은 보지 않기로 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어지러운 마음들이 뒤엉켜 적란운이 일어난다 비를..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조윤주-지구라트 지구라트 그의 손바닥엔 살을 양생養生해 지은 성전聖殿이 있다 손가락을 접었다 펼친 숫자만큼 쌓인 고난의 집 90도로 땅에 닿을 듯 몸을 숙여야만 피어나는, 살의 꽃 약지・중지・집게손가락의 하중을 받치고 있다 무시와 냉대, 긴 여정을 돌아와 칼을 들이대도 꿈쩍 않고 도려내도 통증 없는 지구라트*다 폐지廢紙를 싣고 사계절을 굴리는 그는 날마다 기도를 쌓는다 몇 해의 밤과 낮이 계절을 바꿔도 기도의 응답은 갈비뼈 아래서 칩거 중 닳고 닳은 지문 속에서 길을 잃은 지 오래다 정수리에 흘러내린 땀방울 성서처럼 이고 지그재그로 걷는 곡절의 통로 하루에도 몇 번씩 바닥을 끌고 오르막길을 넘는다 그가 리어카를 세우고 잠시 흙 주름의 얼굴을 닦는 시간 나무들은 맑은 빛을 되새김질해 그늘을 펼친다 부드러운 방향으로 뻗어가..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송 진-내 몸안에는 저탄소 사과가 자란다 내 몸 안에는 저탄소 사과가 자란다 내 몸 안에는 거칠어지려는 나와 부드러워지려는 나가 있다 거칠산역 새벽에 가면 거칠어진 나가 도착해있다 왼손에는 길든 가죽가방을 들고 오른손은 저탄소 사과를 먹고 있다 새벽의 바다는 안개 속에 휘감겨있고 거칠산역 기차는 수평선을 거침없이 달린다 거칠어진 나의 손바닥에는 저탄소 사과의 앙상한 뼈다귀가 놓여있다 움켜쥐어도 한 방울의 즙조차 나오지 않는 말라비틀어진 저탄소 사과의 젖꼭지를 바다를 향해 던진다 투수가 된 거칠산역은 부드러운 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런가 진정 그런가 그렇다 그렇다고 하자 부드러운 나가 두릅역에 내린다 연보랏빛 치렁치렁한 길고 긴 머리카락 위로 해수면이 높아진 봄을 이고 왔다 한 달 내내 내린 함박눈으로 사방은 백야처럼 잠들지 못하고 부드러..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최금녀-코스트코 코스트코 내게 새 모이통을 파는 사람은, 새들이 한 나절이면 우물 여섯 개 값을 다 파먹을 거라고 했지만, 설마하고 코스트코에 가 서 해바라기 씨 10봉지를 샀다 새들을 보면 천사들이 생각나고 카바이트 불빛이 떠오르고, 눈 내리는 마당에 서 계시던 아버지가 보인다. 흰 눈 마당에 너 희들은 누구니? 그때 천막 속에서 아버지와 놀던 너희들과 면 내복을 입어도 몸이 마르던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시니?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보낼 우물 여섯 개 값을 들고 새 모이가 많은 코스트코에 가고, 카바이트 불빛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졌고, 천사 같은 새들이 마당으로 날아오고, 수십 마리의 검은 천사들에게 해바라기 씨를 통째로 부어준다 최금녀 | 1998년 『문예운동』 등단. 시집 『바람에게 밥 사주고 싶다』 등. 시선..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박미란-꽃무릇에게 꽃무릇에게 벤치에 그가 누워있었다 눈을 감은 건 아니지만 눈을 감은 듯 지친 몸뚱이조차 맡길 데 없는 그때 나는 그 옆을 지나다가 꽃무릇을 보고 있었어 잎사귀 없이 피어도 하나같이 아름다웠는데 그걸 왜 굳이 비극이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눈물을 흘리는 그를 훔쳐보다가 그 자리를 떠나오고 말았지만 이제는 만난 적도 헤어진 적도 없는 이야기들 가끔씩 나도 바닥이 되길 원했던 것처럼 몸을 돌돌 말고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면 몇 송이는 나의 애인처럼 왕관을 펼친 채 피어났어 같은 계절, 같은 공간에서 어떤 꽃은 찬란하고 또 어떤 꽃은 기가 막히게 누추한지 각자 피는 일에 집중할 때 그 안쪽은 너무 어둡거나 밝아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박미란 |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