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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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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태형 - 창라 창라 가다가도 굽이를 치기 마련이듯 길은 뻗어 올라왔다 길 아닌 곳조차도 누군가 지나왔다 소금가마니를 실었을까 잘 빻은 보릿가루를 짊어졌을까 눈이 크고 순한 짐승의 잔등에 짐을 싣고 설산을 넘어오던 오래된 길이 어딘가에 또 숨겨져 있었다 은가락지를 하나 만들기 위해 말린 살구 포대를 들고 깊은 마을의 대장간을 찾아 들어갔으리라 그 길에 살구꽃이 한창 흩날렸으리라 구불구불 했으리라 사람이 지나가는 길이었다 높은 하늘을 붙들고서야 내려갈 수 있는 길이었다 안개가 내려서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김태형|1992년 『현대시세계』 등단. 시집 『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코끼리 주파수』 등. 산문집 『초능력 소년』 등. 제4회 시와사상문학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왕노 - 불의 낫 불의 낫 아버지께서 새벽 모서리에 자리 잡고서 녹슬고 무디어진 낫을 가신다. 잠깐 비워두면 잡풀이 돋아나는 할아버지 산소를 벌초하러 그간 뒤란에 팽개쳐둔 낫을 찾아 젊었을 때 논두렁 밭두렁 풀을 깎고 소꼴을 하러 낫을 갈듯 죽은 날을 새파랗게 살리신다. 휘두르면 어둠이 절단 날 낫 불의 낫 한 자루를 준비하신다. 잠깐만 팽개쳐두면 녹이 슬고 무디어진 아버지의 일상도 눈치코치도 없고 감각이 없는 내 촉의 각도 새파랗게 세워주며 아버지 팽개쳐둔 낫을 가신다. 언젠가 낫을 갈며 이 낫으로 동학처럼 미친놈에게 확 들이대는 날이 와야 이 땅의 사람과 내가 잘 사는 날이 올 거라 하셨던 아버지가 다시 낫을 가신다. 무디어진 세월에 새파란 날을 아버지가 새벽부터 세우신다. 김왕노| 192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공광규 - 저녁 무렵 강변 저녁 무렵 강변 청미천이 버드나무와 갈대를 데리고 와 남한강을 만나는 옛날 나루가 있었다는 도리마을 앞 강둑 습지에는 뗏목 꾼을 따라와 무리를 이루고 사는 단양쑥부쟁이 밭이 은하수 내려온 듯 부옇고 강 언덕에는 별무더기가 금계국으로 환하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 시절에도 마당에 모여 풍물 치며 행진하는 나루굿을 하고 수박과 돼지머리와 마른 북어를 놓고 절을 한다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와 머리카락이 겨울 산처럼 희고 깨끗한 의리가 히말라야만큼 높은 시인이 마을사람들과 잘 어울려 사는 동네 농장에서는 저녁닭이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닭울음소리에 화답하듯 정겹다 개망초와 쑥부쟁이와 금계국과 나리꽃이 환한 청미천이 남한강을 만나는 곳에서 옛 도리나루터까지 강물 따라 걸어가는 붉은토끼풀 꽃이 핀 저녁 무렵 강변 공광규..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박남준 - 보드카를 마실 시간 보드카를 마실 시간 달리는 영혼이었나 중앙아시아의 창밖 흔들리며 다가오는 황무지는 추 추¹ ~ 말 잔등을 채찍하는 유목의 길이다 해질녘 소꼴을 먹이는 아이와 흙먼지 날리는 길가에서 환한 손 흔들어주는 순한 얼굴들 오래지 않은 어제가 돌아가야 할 내일이 아니냐고 묻는다 기억들은 미루나무가 많은 옛 마을을 더듬는다 저 나무들 사이 흙먼지 자욱한 낡은 버스가 달리기도 했지 그 버스 꽁무니가 흘리는 낯선 냄새를 좇아 코를 벌름거리기도 했는데 코딱지만 한 가게를 할까 작은 그리하여 정겨운 발걸음이 걸어 나올 것 같은 점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만두를 빚던 손을 옷자락에 훔치며 옛날처럼 일어나실까 추억과 시간과 나는 붕붕 봉고차를 몰고 하늘이 맞닿는 산골을 돌며 꿀벌을 칠 것이다 벌들이 돌아오는 ..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이재무 - 시 시 싼 값에 더 좋은 것을 골라 더 많이 주려고 안절부절 못하며 애쓰는, 단 한 줄의 시조차 읽은 적 없는 과일행상 할머니의 어진 마음이야말로 절창 아니고 무엇이랴 이재무|1983년 시작 활동. 시집 『데스밸리에서 죽다』 『쉼표처럼 살고 싶다』 『얼굴』 등. 소월시문학상, 이육사문학상 등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한영옥 - 여러번이 또 여러번 여러번이 또 여러번 비가 온다 나무는 얼마간 제 둘레를 한껏 가려준다 품 안으로 사람들이 뛰어 든다 비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더는 가려주기가 어려웠다 에잇, 사람들은 떠나버린다 미안하다거나 서운하다거나 감정은 언제부턴가 사라졌다 참으로 여러번 일어났던 일은 또 일어날 일이었을 뿐 여러번이 또 여러번 지나가고 떠나갔던 사람들 어찌어찌 와서 어이쿠, 천년이나 된 나무네 놀란 표정으로 한 바퀴 돈다 또 일어날 일이었다 여러번의 여러번 천년의 천년 동안. 한영옥 |1973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아늑한 얼굴 』 『다시 하얗게』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 등. 한국시인협회상, 전봉건 문학상 등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윤희 - 새벽 새벽 새벽이 중차대한 제 임무를 아는 것이 외경이거니와 매번 천칭 같은 지평선에 올라서서 떠나지 않으려는 밤을 구슬려 보내고 진군하는 아침을 은쟁반에 받아 대지 위에 고스란히 부려 놓는 그 새벽 사인(sign) 받으려 누구보다 일찍 눈 뜬 한 사람 있겠다 김윤희|1964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겨울방직』 『소금』 『오직 눈부심』 등. 시와 시학상, 공초문학상, 숙명 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