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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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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이소호 - 불온하고 불완전한 편지 불온하고 불완전한 편지 , 사실 이제 나올 그 들이 저의 입니다. 전 이제 하고 과 멀어진 삶을 살겠습니다. 저는 사실 이 고통입니다. 를 쓰며 단 한 순간도 적 없었어요. 는 전부 거짓말이에요.* * 첫 번째 시집이 나온 뒤 소호는 침대에 누워 매일 매일 이 말을 중얼거렸다. 생각이 생각을 먹고, 술병이 기억을 먹고, 약이 하루를 먹어 치우는 동안. 이제 소호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라는 이름의 또 다른 무엇이다. 이소호 | 2014년『현대시』등단. 2018년 시집『캣콜링』으로 제 37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박세미 - 어떤 키스 어떤 키스 하나의 무릎이 떠오르면 달의 바다가 출렁인다 하나의 귀는 하나의 무릎에 밀착한다 귓바퀴가 부드럽게 감싸는 것은 텅 빈 여름 달의 고요 고여 있던 말들이 귀에서 쏟아질 때 듣는 몸이 된다 무릎은 귀와 함께 무-으-르-읍, 하는 발음 앞에서 공동의 기억을 갖는다 녹지 않는 소금이 차곡차곡 쌓인다 바다 바닥에 박세미(朴世美) |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내가 나일 확률』.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건중 - 9월의 창 9월의 창 아침 창문을 열자 쏴아한 바람이 선선하다 동쪽 등성 넘어선 햇빛 자작거리며 그늘 숲 지나 아파트 모서리 바닥이 따뜻하다 부엌에선 난데없는 아내의 깍 마른 소리 귀뚜라미 한 마리 설거지통에 빠져 허우적거린다고 허겁 거린다. “네가 어찌 여기까지.” 손 살며시 쥐어 창밖으로 넘겨 환생의 길 터줬다 본고향 찾아간 귀뚜리 익어서 누워버린 볏단 위에 메뚜기와 한 쌍 되어 시린 사정 열어놓고 풍성의 노래 한 곡조 신나게 부르는데 그 맑음이 너무 청냉스러워 정선 아리랑도 웃음 짓고 지나갔다 볏단에 농로는 길어 밀짚모자의 비지땀 바쁘게 익어가고 벌이 쏘지 않아도 저절로 터지는 밤송이 꽉 찬 속살이 알알이 익어 떨어지는 밤. 저녁 살을 채운다 들판에 땀내 나는 향기로 바닥에 번져가고 하루해가 짧아 논두렁은 숨..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박하리 - 흐린 달빛 흐린 달빛 젖은 옷에 스미는 빗물이 그의 살갗에 닿을 때 통증은 뼈에 박힌다. 욱신거리는 육신은 걷고 또 걷는다. 집을 향하는 그의 발이 젖는다. 부엌에서 들리는 소리가 시끌시끌하다. 그의 아내가 그가 목으로 넘길 수 있는 먹거리를 만들고 있다. 그의 눈에 보이는 전등의 불빛은 흘러내리는 비다. 세상으로 떨구어져 열심히 살았던 하루가 그에게는 남은 하루고 그의 아내에게는 이별의 시간이다. 비는 멈추고 흐린 달빛이 그에게 다가와 속삭인다. 괜찮아 누구나 한 걸음씩 다가가는 그 길에 먼저 다가서고 있는 그의 눈은 눈물이 가득하다. 그리운 어머니가 생각이 나고,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의 눈이 흐려진다. 그의 아내도 흐려진다. 박하리 |2012년 『리토피아』 등단. 시집 󰡔말이 퍼올리는 말󰡕. 계간 『리..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채재현 - 추억 추억 마트에 들어가 풍성히 쌓아놓은 이름도 까마득한 나물 한 봉지 고른다 고요가 적막 속으로 들어가 집안을 점령한 시간 어릴 적 내가 캐던 것들이 주름진 손에 기댄다 흰잎나물 고춧잎나물 우산나물 이름도 정겹다 내일의 식탁에 올릴 나물들 다듬는 동안 어둠이 빠져 나간 길목으로 어린 소녀가 새벽을 걸어오고 있다 채재현 |2011년 계간 『문파』 등단. 시집 『어느 날의 소묘』.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변희수 - 옥수수가 익어갑니다 옥수수가 익어갑니다 내가 여름을 다 말해버리면 옥수수는 익지 않는다 촘촘한 치아가 아름답다고들 하지만 매미 울음이 어금니에 박혀 빠지지 않는다 뭉개어지고 으깨어지는 말들 입속이 붐비면 처진 어깨를 조금 흔들어 보이거나 으쓱거려본다 치아와 치아 사이에 거웃처럼 비밀이 자란다 혀를 길게 빼문 한낮의 발설에 귀를 기울이던 바람이 천천히 수염을 쓸어내린다 태양의 내란과 음모를 기억하던 여름이 벌어진 입을 조금씩 다문다 단전을 끌어올려 이빨 사이로 스,스,스 날숨을 뱉어본다 독 오른 뱀이 산으로 올라가고 당신이 잘 볶은 옥수수차를 말없이 내놓던 일 근자에, 더 좋은 일은 없었습니다 옥수수는 이미 무량무량 익었습니다 변희수 |2011년 영남일보, 201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아무것도 아닌, 모든』 『..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이경철 - 성벽 산책 성벽 산책 옛 성벽 며칠째 비 맞고 있다 오랑캐 말발굽소리 같은 장대비 화살 튕겨내고 있다 선녀와 나무꾼 전설로 흐르는 천변 짓밟히고 쓸려간다 한 시대 목숨 건 성벽 역사, 신화와 전설 표지석 되어 무겁게 짓누르는데…… 장마 틈틈이 열리는 허공 가득 고추잠자리 난다 가볍고 허무한 것들 삼베처럼 성근 잠자리 날개 틈새가 낳는 허공 또 허공 속 자유로운 시그널들 어지러이 날며 여는 우주의 잠깐, 이른 가을 꽃 핀다. 이경철 | 2010년 『시와시학』 등단. 시집 『그리움 베리에이션』. 저서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 『미당 서정주 평전』 『현대시에 나타난 불교』 등. 현대불교문학상, 질마재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옥남 - 잊혀진다는 것 잊혀진다는 것 가슴이 붉다 그 뜨거웠던 태양도 사그러들고 둘만의 오두막엔 암전이 된 지 오래 그리움, 다시 꺼내 심폐소생술을 시켜본다 우주 끝까지 가자던 약속 희미해져 입술에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간간히, 문득, 어쩌다가 그대 온기 그리워 몸살을 앓는다 잊혀 진다는 건 가슴이 발갛게 시린 일이다 생손을 잘라내는 것 보다 더 몸서리치게 아프다 김옥남 | 2010년 『문파』 등단. 시집 『그리움 한 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