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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겨울호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지연 - 펼쳐지는 집

펼쳐지는 집



흰 선이 더러워지는 속도에 놀라게 되겠지.

흰 선만 밟으면서 건너는 거야, 이것이 오늘의 규칙이라면. 길을 걷고 길을 건너서 더 멀리 가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라면. 충분히 흰 선이, 새하얀 선이 없는 건널목 앞에서.

 

집은 완벽하게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아파트 광고 위로 지나가는 문구를 보고 있는 우리, 환한 방에서 눈을 뜨는 우리는 집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이불은 너무 부드럽고 너무 깨끗하고 누구나 쉽게 베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시간은 계속 도착하고 있고 미래는 끝없이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 우리가 망가지는 데엔 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려주면서.

 

섬을 산 사람은 섬 전체를 거대한 정원으로 만들고 싶어 했대. 여기서 식물들은 날씨를 마음껏 조율할 수 있는 것처럼 자라고 있네요. 하지만 아무리 거대한 정원도 세계보다 클 수는 없으니까요. 집과 정원을 뒤로하고 걷기 시작하는 사람은 말했어.

 

친구들은 이불 바깥에 살 거야. 모르는 길을 걷고 모퉁이를 돌아 모르는 얼굴을 마주치며. 미래의 친구들은 집이 아닌 곳을 떠올리기 위해 아주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면. 어디나 집이라고 느낄 수 있고 느낌에는 믿음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면.

 

새하얀 선이, 충분히 흰 선이 없는 건널목 앞에서. 돌아 서서. 나란히 진 사람들로 우리는. 손을 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

 

입김들은 창문에서 모조리 부서지고 있네. 창문에 서린 김이 새하얗게 바깥을 차단하고 있네. 우리는 손가락으로 김 서린 창문에 낙서를 하고 있고 세상은 우리가 그린 모양대로 보여.

 

이 추위가 지나면 문을 열고

부서진 입김들을 잘 묻어줘야지.

 

목적지 없이 걷는 일을 사람들은 산책이라고 부른다.

멀고 긴 산책을 해야지.

 

길들은 처음부터 충분히 어지러운 색이라 규칙 같은 건 필요 없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반쪽의 이야기〉 중에서.

 

 

 

 

 

김지연 2019문학과 사회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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