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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0년 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수필마당] 김세희-사랑한다면

사랑한다면

 

  하늘이 깊어지는 계절의 문턱에서 그들은 우연히 만났다. 인연이 악연이 되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자연에서 맘껏 날아다녀야 할 장수풍뎅이는 벽돌 두 개 정도 펼쳐 놓은 크기의 방에 갇혔다. 여덟 살 천진난만한 아이가 자유를 갈망하는 곤충의 눈빛에는 관심이 있을 리 없다. 열 네 번의 낮과 밤이 반복되었고 아이는 큰 결심을 했다. 장수풍뎅이를 데려왔던 자연휴양림에 방생하니 숲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여덟 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장수풍뎅이는 자연으로 돌아가 흙이 되고 바람이 되었을 것이다. 진정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원하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울고 있는 아이의 눈동자에서 아버지를 잃고 슬퍼하던 나를 발견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여름부터였다. 엄마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 계기가. 하루에 한 번씩 안부전화를 하고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는 날은 괜스레 불안했다. 엄마와 10분 거리에 있는 오빠도 나에겐 무용지물이었다. 물리적 거리 357km, 쉬지 않고 100km 속도로 달려도 꼬박 4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마음으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며 속을 끓였다. 엄마에 대한 지나친 애정, 벽돌 두 개 넓이도 되지 않는 내 마음에 그녀를 가두려 했었나보다. 파도가 급하게 밀려들면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듯 내 서툰 애정표현에 뒷걸음 내딛고 있는 엄마의 마음을 그땐 읽지 못했다.

  엄마와 멀리 떨어져 지내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자유로운 영혼인 나를 다듬으려 하던 그녀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다. 낯선 도시 서울에서의 시간들은 상상했던 것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엄마의 잔소리만 없으면 황금빛 인생이 펼쳐질 거라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 속 그녀의 자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가끔 들르는 카페에서 길을 지나치다 무심코 시간이 날 때마다 어김없이 엄마와 닮아있는 흔적들을 찾고 싶어 했다. 그녀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을 만나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다. 멀리 떠나오고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엄마를 벗어날 수 없는 어른아이였다는 것을.

  엄마와 딸 비슷한 듯 다른 두 사람.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 얽히고설켜 있지만 서로의 굴레를 벗어 던질 수 없다. 한 지붕 아래 살 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의 역할은 시시각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지만 신의 영역은 아님을 알아간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사춘기 직전 딸을 보며 엄마의 복잡 미묘했을 마음을 더듬어간다. 사십 대 중반이 된 내 시야에 언제부터인지 보호받고 싶은 여자, 감정이 요동치는 사람인 엄마가 보이기 시작했다. 행복했을까, 엄마의 77년 삶에서 나와 함께한 절반의 시간들은. 사랑한다면 이제부터라도 엄마의 방식대로 그녀를 사랑해야겠다. 천천히 은근하게.

 

 

김세희 | 2018년 계간 『문파』 수필 등단. 시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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