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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0년 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수필마당] 반승아-만종: L'Angélus

만종: L'Angélus

 

  밀레의 그림 <만종(晩鐘)>은 제목이 참으로 적절하다. 저녁나절의 종소리에 맞추어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은 소박하지만 경건하고, 겸손하지만 굳건하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디에선가 뎅, 뎅 하는 낮고도 묵직한 종소리가 해질녘의 공기를 가르며 들려오는 것만 같다. 사실 이 그림의 원래 제목인 L'Angélus는 ‘삼종기도’이다. 삼종기도는 천주교에서 아침 6시, 정오, 저녁 6시에 바치는 기도이다. 삼종기도는 당시 시계의 역할도 대신했을 것이다. 분초를 다투며 살지 않던 시절, 사람들의 삶은 순박하고 단순했으리라. 날이 밝으면 일어나고 해가 중천이면 잠시 쉬고 어스름이 내리면 긴 그림자와 함께 집에 돌아오는 삶. 자연이 알려주는 흐름 속에 그 일부로서 살아가는 삶. 일용할 양식을 주신 신에게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마치는 삶. 이 ‘그림 같은’ 삶을 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대학교 졸업반이 되었을 때, 취업난은 이미 깊어져 있었다. 제법 괜찮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소위 ‘5종 세트’ 라는 조건이 있었다. 학점, 토익, 교환학생, 공모전, 인턴 같은 것들이었다. 간신히 요건을 갖춰 놓았지만 원하는 회사에 취업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턱없이 좁은 채용문 앞에서 자꾸 마음이 콩알만하게 움츠러들었다. 한 회사의 임원 면접을 보던 날, 절박한 마음에 무릎까지 꿇고 기도를 드렸다. 이 곳에서 합격 통보를 받으면 뒤 이은 다른 회사의 면접과 원서 접수는 모두 포기해도 좋을 만큼, 꿈에 그리던 곳이었다. 거저는 안 될 것 같았다. 신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만약 이 회사에 들어가게 해 주신다면 제가 매일 아침마다 삼종기도를 바치겠노라고. 대학교 졸업반이 될 때까지도 아침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시간표에서 가장 이른 수업은 오전 11시 시작하는 수업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탓이었다. 지금이야 실소를 금할 수 없지만 당시에는 아침 6시 삼종기도가 대단한 희생이라 확신했다.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다행히도 이 패기는 신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했던 듯하다. 주위에서는 입사 원서 딱 한 번만 쓰고 취업에 성공했다며 부러워했다. 그 대가로 평생 동안 공약을 실천해야 하는 줄은 그들도 나도 몰랐다. 합격 문자와 동시에 아침마다 삼종기도를 바치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어차피 출근을 하려면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니 다행이었다. 문제는 이 약속의 시작일은 정해져 있는데 종료일을 지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처음 며칠은 들뜬 마음으로 기도를 했지만 한 달 두 달이 지날수록 귀찮은 마음이 들었다. 1년 정도면 되겠지. 혼자 기간을 설정했다. 1년을 채우고 나니 야박한 생각이 들어 3년을 채워 보기로 했다. 3년이 지나고 나니 습관이 되었다. 슬그머니 며칠을 건너뛰다가도, 마음이 산란한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벌을 받은 것이 아닌가 퍼뜩 놀라 다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었다. 과연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군, 이렇게 확실히 기도를 바치게 하다니.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만기일이 없는 덕분에 13년을 꼬박 기도하게 되었다.

때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기도 했다. 이만하면 된 것이 아닌가. 이제 신도 잊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슬그머니 그만해도 모를 수도 있지 않은가. 신이 과연 나의 기도를 듣고 있는지,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는지 여부에 대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가끔은 존재 여부조차 의심스러운 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계속하는 것은 이제 이것이 신과의 약속을 넘어 나 자신과의 약속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을 내세운 나 자신과의 약속. 아침 여섯 시마다 마주하는 것은 기도를 바치는 신이 아니라 기도를 하던 대학 졸업반 학생이다. 노동의 신성함에 목말라 있던, 이 회사의 로고를 지갑 속에 간직하고 다니던 학생. 열렬히 원하던 것도 막상 손아귀에 들어오면 열정이 수그러들기 마련이다. 기도는 나태와 교만에 빠지려는 순간마다 일깨운다. 당연하게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실은 당연한 것이 아님을. 밥벌이의 고단함 보다는 직장이 있다는 안온함에 주목해야 함을. 20대의 미숙함을 30대의 성숙함으로 성장시킨 대신 20대의 열성을 30대의 건성으로 맞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밀레의 그림 속에서 들릴 것 같은 깊은 종소리 대신 핸드폰의 알람 소리에 시작되는 아침이지만, 고개 숙여 기도하는 필부의 마음은 그림 속의 그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터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도 핸드폰의 울림과 함께였다. 그 작은 기계의 진동에 마음이 요동쳤다. 아침의 삼종기도를 바치고 나면 오 분만 더 자고 싶은 유혹은 새벽 공기와 함께 흩어지고 출근 준비를 할 수 있는 오늘이 새삼 감사해진다. 아침마다 일어나 나갈 일터가 있다는 것은, 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잠시나마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바칠 만큼 소중한 사실임을 매일 아침마다 상기하는 것이다. 신이 지워준 짐이라 생각했던 이 과제는 사실 신의 선물인 것이었다. 모든 결실은 땀방울 뒤에 오는 것이기에 노고가 두렵지 않다. 아침의 삼종기도가 습관이 되면서 자연스레 저녁 삼종기도를 바치는 횟수도 늘어난다. 장소는 집이 아니다. 때로는 사무실에서, 혹은 퇴근길 지하철에서, 혹은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길에. 잠시 발걸음을, 하던 일을 멈춘다. 혼란한 도시의 소음이 소거되면서, 순간 만종이 울리는 것만 같다. 맑고 고요하다. 실로 그림 같은 삶이다.

 

 

반승아 | 2019년 계간 『문파』등단.

저서 『퇴근할까 퇴사할까』(더블유미디어,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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