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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0년 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수필마당] 박현섭-이사 가는 날

 

 

이사 가는 날

 

본디 지닌 모든 것에서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많다. 뚝 떼놓고 싶은 것 중 계절의 변화에 민망하리 만치 민감하다. 추위에 약하고 더위에 기진맥진하는 저질 체력 탓으로 다른 사람들은 별 탈 없이 잘 지나가는 여름 한 귀퉁이가 늘 허물어진다. 자물쇠를 닫아거는 현관 앞 현기증에 더위 탓이라고 억지 핑계를 대는데  책방인데 시집 한 권 보내겠다는 막내딸 문자다. 목젖에 차오르는 낌새를 용케 잘 알아채는 막내딸 덕분에 왈칵 솟구치는 눈물이 결국 계단을 헛잡게 한다. 며칠, 다스려지지 않던 속내가 비정할 만큼 어쩔 수 없이 모질어졌다. 오뉴월 땡볕임에도 가슴속은 서걱거린다. 
사회이건 가정이건 무슨 일에서나 중심은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집단의 형평을 이루게 된다. 가족 구성원 중 맏이가 중심이라야 평화롭다는 말을 흔히 듣는 그 구조적인 역할에서 우리는 어쩌다 중심을 잃은 집이다. 가족 구성원에서 반드시 중심이길 바라는 어머니 덕(?)에 어쩔 수 없이 짊어지게 된 중책에서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중심을 잃는다는 건 모두를 나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네 말이라면 모두 다 따를 테니까. 네가 중심이니까’ 그 말이 얼마나 나를 옥죄는 말인데 왜, 나를 꼭 내세우려 드느냐고 가끔 패악을 부릴 때도 있었다. 그 삐걱거리는 구조적인 역할에서 어쩔 수 없이 ‘반드시 중심 원이라야 된다’던 어머니 바람에서 엇나가려도 벗어나지 못했다. 
반 년 전, 대수롭지 않던 낙상 사고로 병원 입원 후 당신은 꼭 돌아오리라 굳게 여기는 어머니가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셔야 한다. 어머니 혼자 견고하게 지키던 성城을 허물어야 하는 중책감에 숨통이 트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성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십수 년 타향살이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모신 선산이 곁에 있고 큰길을 건너면 우리 오 남매 탯줄을 묻은 옛집이 있던 곳. 긴 시간 갖가지 사연과 흔적을 간직한 그곳을 뒤로한 채 어머니를 이사시키는 일이란 만만치 않다. 친정 집 현관 열쇠를 꽂았으나 내가 다시 이 문을 열리 없음을 아는 탓일까. 숨이 넘어갈듯 호흡이 가빠진다. 더위에 지친 게 아니다. 다급하게 구급차에 실려간 어머니 흔적들이 몇 달을 고스란히 지켜드리던 방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엄두를 낼 수 없다. 덩치 큰 가재도구야 동생들 몫으로 미루지만 철철이 옷매무새를 잘 다듬던 어머니 옷장을 열었다. 일주일에 겨우 한 두 번의 출타에서 늘 자식자랑을 덧칠하던 옷들을 우르르 쏟아냈다. 
요양병원 침상에서 뽐낼 수 없는 옷들이 이제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불이 개켜진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무늬 이불자락에 찌든 얼룩이 선명하다. 평소 깔끔하던 어머니 성품에도 김칫국물 얼룩지고 솔기 터진 바짓가랑이 한쪽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잠옷과, 찌들어 버린 수건 나부랭이와 온갖 잡동사니가 담긴 쓰레기봉투들이 현관 밖에 쌓였다. 내일은 붙박이처럼 떨어지지 않는 어머니 엉덩이를 억지로 떼어내 평소 ‘고려장’이라 싫어하던 요양원에 앉혀드려야 한다. 자리를 옮겨 앉는 것은 새로운 기대가 있게 마련이지만 내일을 앞둔 이사에는 아무 말도 쉽게 건넬 수 없는 침묵만 기다린다. 나는 왜 내 딸의 위로는 수시로 받으면서, 어머니께는 곰살궂은 딸이 되지 못하고 끝내 면목없는 죄인이어야 하는 걸까. 친정집 천 길 낭떠러지 계단이 뿌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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