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마당/2021년 가을호

(35)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천수호-빈방 빈방 사진이 걸린 방 눈동자에 빛이 새날 아침처럼 그득 담긴 그가 입은 정장은 상복에 가깝고 하려는 말이 전혀 없어 보이는 입술 그것이 사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쉽지도 않고 그가 방을 둘러볼 때마다 빈 곳은 사라진다 저 왔어요, 내 말이 너무 커서 빈 곳이 생기기 시작한 방 사라진 이불 밑에서 들리는 고른 숨소리 작은 쌀 봉지 옆에 두어 개 남은 팩 두유와 느슨해 보이는 휴 지 꾸러미 비누 몇 장과 치약 두어 통 산 자의 것이 널브러진 이 방 그를 한 번씩 흔들어 깨우던 울음소리도 집을 비워서 썩지 않는 것만 남아서 산 자를 증명하는 방 바닥은 차고 매끄럽고 생시라 부르기 어려운 것들을 불러내기 좋은 곳 떠난다는 말이 이렇게 꽉 찬 구멍들이라는 걸 한 장의 사진이 대신 말하고 있는 아직 문을 열지 ..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이현실-연뿌리 연뿌리 저것은 물밑에서 숨을 쉰 흔적 구멍으로 드나든 연못 한 채 하늘까지 다 받아 모시고 푸른 지붕 높이 올렸네 구멍으로 지은 집은 튼실한데 식솔들 끌고 거리에 내몰리던 家長은 캄캄한 물밑처럼 수심이 깊었네 뼛속 진액들 다 빼앗기고 허방다리 짚으며 허우적거릴 때 늘어가는 빚의 구멍들, 바람의 구멍들 파문은 멀리까지 흘러갔네 뼈를 세운 것들은 그늘도 넓어 저 뿌리 얼마나 깊은지, 구멍의 힘으로 연못이 번식하네 이현실 | 2003년 『예술세계』 『미래시학』 등단. 시집 『꽃지에 물들다』 『소리계단』. 제 5회 영농신문 주최 농촌문학상, 국가보훈처 보훈콘텐츠 입상(2019)외 다수. 현 계간 『미래시학』 편집주간.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송승환-깃발 깃발 파도 파도 파도 숲과 오름 너머 곶자왈 지나 저 푸르른 산간 돌개바람 속에서 흩날리지 않는 깃발 속으로 타오르면서 흐르는 불 물 고이면서 굳은 돌 바위와 모래 사이에서 물과 불을 지니고 나는 언제 폭발할 것인가 나는 언제 폭발할 것이다 저 창공을 향해 휘날릴 것이다 최초의 불과 연기를 품고 나는 하늘 아래 하나의 깃발 한라 송승환 | 2003년 『문학동네』 시 등단. 2005년 『현대문학』 평론 등단. 시집 『드라이아이스』 『클로로포름』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등.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홍은택-어떤 오후가 어떤 오후가 붉고 투명한 비늘을 단 거대한 물고기 몸짓으로 헤엄쳐간다 정적 속으로 구릿빛 뒤웅박이 징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그들의 정수리를 딛고 익숙한 태양이 뚜벅뚜벅 걸어간다 낮잠을 갈아 내린 드립커피 한 모금 피카소의 시선으로 발뒤꿈치를 바라본다 잠결 따라 스트레칭 하듯 모란 꽃잎이 피고 꽃잎 따라 펼쳐지는 몇 갈래 인연들 점점 키가 작아지는 담벼락 끝 멀리 파블로프의 뒤통수가 소실점으로 사라진 뒤 잠깐 잠을 더 잘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침묵 노래하는 법을 잊은 어떤 오후가 홍은택 | 1999년 『시안』 등단. 시집 『통점에서 꽃이 핀다』 『노래하는 사막』. 공역시선 『영어로 읽는 한국의 좋은 시』.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김지헌-안개의 도시 안개의 도시 안개의 나라엔 소리들이 모여 산다 폭주족처럼 제멋대로 들이 닥치거나 보이지 않는 소리들이 텃밭을 갈고 밥을 먹고 자동차가 시동을 걸고 일터로 간다 때로 안개의 흡반에 빨대를 꽂고 소리들을 먹어치울 때가 있다 수심 깊이 소리들 가라앉아 수심(愁心)이 되는 안개의 도시에서 얼굴을 덮어버린 마스크 텅 빈 거리 봉쇄 된 입 한 때 야단법석의 오후를 가졌던 사람들도 하나 둘 안개의 도시로 몰려들었다 어느 날 불쑥 여기를 떠나 저기로 사라진 사람들 지리산 한 달살이 혹은 섬사람 되어보기 같은 것 안개처럼 뭉쳤다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들이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손짓한다 누구나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고 아직도 존재를 걸고 시를 쓰거나 몇 개의 약속을 늘어놓으며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어서 빠져나오라고 긴 ..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정경해-엄마는 엄마잖아요 엄마는 엄마잖아요 -가방 속 아이* 내 꿈은요, 언젠가 본 그림 속 식탁에 어깨를 기댄 사과 몇 알처럼 함께, 그래요 ‘함께’는 한데 섞여 어우러지는 거래요. 사과처럼 불그스레한 얼굴로 아버지가 웃으면 엄마가 웃고 나는 풍선처럼 부푼 말들을 식탁 위에 마냥 쏟아내며 깔깔깔 웃음이 헤픈 아이로, 함께요. 가로 44㎝ 세로 60㎝ 폭 24㎝ 가방, 아니 캄캄한 구멍에 나를 구겨 넣고 엄마는 당신 꿈을 다지듯 가방 위를 잘근잘근 밟았어요. 틈새로 내 꿈이 자랄까 봐 쿵쿵 뛰고 또 뛰며 뜨거운 드라이기 바람을 불어넣어 가방 속에 당신 꿈을 녹이려 했지요. 궁금해요. 날 낳은 엄마는 저를 사랑했을까요. 내가 세상에 나오길 손꼽아 기다렸을까요. 나도 엄마 뱃속에서 발장난치고 하품도 하며 어리광을 부렸을까요. 아, ..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서정학-지하은행 지하은행 길 건너편 상가 지하 2층에 은행이 있다. 낡은 문을 밀며 들어서면 지하 특유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꾸깃한 지폐 냄새가 섞여, 무덤 같은 어둠과, 그 속에 붉게 빛나는 눈들이 있다. 매일 청소를 하지만 거미줄에는 노란, 줄무늬가 무서운 거미들과 천장의 석류램프에는 이따금씩 나방들이 뛰어들어 터지는 비명이, 들리고 매일 청소를 하지만 바닥은 끈적거리는, 늪의 습기와 썩어들어가는 나뭇가지들과 무언가가 가라앉고 있다. 상가 계단은 아래로, 지하로, 어둠 속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한참을 내려, 가다, 보면 은행 문이 보인다. 낡은 문을 밀고 들어서면 급여이체를 위한 추가상품과 지로 공과금과 주택청약종합저축 안내문이 덜덜, 떨고 바람은 왜 그리 세게 부는지, 서늘한 감촉의 카드와 무인지급기와 도장과 보..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윤제림-지구인 지구인 …한때 같은 별에 살았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는 지금 어깨동무를 하고 바싹 붙어 앉아 있다, 처음 본 사이에! 다 어디로들 갔을까, 두 사람은 여기 있는데 윤제림 | 1987년 『문예중앙』 등단. 시집 『삼천리호자전거』 『황천반점』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등. 시선집 『강가에서』. 동시집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 동국문학상, 지훈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등 수상. 서울예술대학교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 역임. 현재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