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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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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곽효환 - 기쁘다 구주 오셨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소란하고 어지러운 밤 그래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거룩한 밤, 마스크를 쓴 얼굴을 투명가리개로 한 번 더 가린 동방박사 세 사람 아기예수께 경배한다 유향과 몰약과 황금을 든 손에 마스크와 손 소독제와 백신을 더해 든 손을 모아 공손히 허리를 숙인다 새로운 BC와 AD의 경계가 완성되었다고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갈라진 분기점에서 이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게 되었다고 성당도 교회도 모두 문들 닫아 아무도 보지 못한 구주를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만백성이 고개 숙여 맞이한다 * 2020년 12월22일 이탈리아 움브리아주(州) 오르비에토시(市)의 지하 기독교 유 적지 ‘포초 델라 카바’에 얼굴을 마스크와 투명가리개로 가린 동방박사 3인의 조 각상이 전시되었다. 곽효환 | 1996년 세계..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이진숙 - 어스름이 깔릴 때 어스름이 깔릴 때 외딴 집 굴뚝 끝에 저녁연기 오른다 어쩌라고 벚꽃까지 흩어지며 날리는가 나는 왜 눈물이 나나 저만치 강이 간다 이진숙 | 1995년 『시조생활』, 2002년 『예술세계』 수필 등단. 저서 『하루가 너무 길다』 『창 너머엔 노을이, 가슴 속엔 사랑이』 등. 시천시조문학상, 허난설헌문학상, 국민훈장목련장(대통령) 등 수상. 한국문협문인권익옹호위원. 국제PEN전통문화위원회 위원장. 현대시인협회, 시조시인협회, 서초문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박세희 - 홍련암 홍련암 거기 솔방울만큼 쪼그만 여자 바닷가 절벽 위에 위태로이 앉아 있는 여자 그토록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는 여자 무조건 절 한 번 올려도 좋을 오래된 여자 마룻바닥에 엎드려 절하다 오백 원짜리 동전만한 구멍을 보았네 한없이 깊은 그 구멍 한없이 음산한 그 구멍 한없이 질펀한 그 구멍 한없이 넓은 그 구멍 한없이 빠져죽고 싶은 그 구멍 한없이 다시 태어나고 싶은 그 구멍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여자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그 여자 홍련암: 양양 바닷가에 있는 ‘낙산사’의 부속 암자 박세희 | 1993년 『문학과 의식』 등단. 시집 『사랑과 혼숙하다』 외 다수.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여성문학 인협회 이사.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오현정 - 동쪽 언덕이 건너온다 동쪽 언덕이 건너온다 넘치면 화가 되는 물과 불, 심지를 조절해야 쫄깃해져요 대통나무 속에 수액이 돌면 주위가 야들해져요 동파육 레시피의 비법은 팔각향이죠 뭉친 걸 풀고 눈밭 위를 나는 동박새 깃털을 봐요 숙성의 경계에 서서 돋아나는 봄결을 혀끝에 앉혀요 모르는 사람은 사는 게 맛없다하고 외로운 사람은 촉촉한 곁을 잡아당겨요 끓이다 졸여본 소동파처럼 상큼한 청경채 한입 베어 물어요 당신이 오실까 물의 옷 불의 신발이 언덕을 오르고 있어요 아웅다웅 세운 오감이 뭉근해져요 잘나고 못남이 없는 여기를 건너가요 오현정 | 1989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라데츠키의 팔짱을 끼고』 『몽상가의 턱』 『광교산 소나무』 등. PEN문학상, 애지문학상, 김기림문학상대상 등 수상. 한국시인협회 이사, 국제PEN한국본부..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김정원 - 님의 분노 님의 분노 캄캄한 밤이 무서워 방콕인 개똥벌레*가 가여워 님은 꽁무니에 등불하나 달아주셨다 어둠 가르고 반짝거리며 훨훨 반딧불이는 밤하늘이 즐겁다 천지가 환한 대낮 사람에게 님은 복면같은 마스크를 끼게 하셨다 사람이 무서워 방콕하는 나날 하여도 쓰러져 실려 나가는 무리 어둠의 그늘에서 헤매고 울부짓는다 아흐~! 사람아 우리 옛같이 같은 별 바라보며 그렇게 살고지고 님이시여, 오래도록 더불어 살아온 사람을 깊이 사랑합니다 한때 못난 탕자를 용서하시고 사랑과 자비로 부디 보듬어 주소서 땅 위에 꽃나비 울지 않는 평온을 심어주소서. *개똥벌레=반딧불이 김정원 | 1985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허虛의 자리』 『분신』(The Alter Ego, 한영시집) 『삶의 지느러미』 등. 율목문학상, 민족문학상, 소..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김현숙 - 겨우살이 겨우살이 하늘에서 내려앉은 저 초록별 둥지들 햇볕 쬔 시간들을 엄동의 참나무에 걸어 목숨의 일대장관(一代壯觀) 봄 앞서 펼치다 김현숙 | 1982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물이 켜는 시간의 빛』 『소리 날아오르다』 『아들의 바다』등. 윤동주문학상, 한국문학예술상, 후백문학상, 이화문학상 등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김종희 - 나는 누구인가요 나는 누구인가요 치명적인 영혼의 새 나는 누구인가요 별들의 가슴에서 터져 나온 별 먼지로 지어진 나, 영원한 빛의 흐름을 타고 이 세상에 나타났으나 곧 사라져야 할 나는 고향 가는 길을 잊어 버려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다 그냥 어둠 속으로 사라질 거예요 왜냐하면 온 우주에서 제일 존귀하고 가장 위대한 능력을 지닌 생명의 주인공인 보이지 않는 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 죽을 수 없는 우주가 창조되기 전의 존재, 영원의 실재(實在)이므로 김종희 | 1982년 『시문학』 등단. 시집 『이 세상 끝날까지』 『S부인은 넘어지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등. 시문학상, 크리스쳔문학상, 영랑문학대상 등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노향림 - 스킨답서스는 날개를 단 흔적이 있다 스킨답서스는 날개를 단 흔적이 있다 베란다 창틀에 쿵! 무언가 부딪치고 빨래 건조대에서 표백되어가던 햇빛 몇 벌이 출렁거린다. 위층에서 던진 화분이 떨어지고 나는 난간에 걸린 푸른 줄기를 순간 낚아챘다. 날개는 많이 상해 있었지만 잔뿌리와 줄기는 몇 몇 남아 있었다. 그는 깊은 혼수상태에 빠진 뒤 며칠 만에 깨어났다. 기진해 있던 입에서 뭉친 숨길처럼 광합성을 토해내고 철봉 하듯이 제 몸을 늘이는 것이 아닌가. 잎이란 잎에서는 푸른 박쥐들이 튀어나와 날아올랐다 날마다 허공을 붙잡고 제 몸 늘여 내려오더니 우리 집 베란다를 곧 진초록으로 물들여놓는다. 잠도 자지 않고 제 몸을 늘이고 늘이는 그를 나도 모르게 그만 꺾고 또 꺾어내었다. 자고나면 생기고 생기는 매듭들 통제할 수 없는 그 생명력을 보는 건 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