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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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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최서진 - 새를 들어 올리는 매화가 피겠다 새를 들어 올리는 매화가 피겠다 두고 온 인연을 바다보다 날아가야 할 먼 하늘을 본다 당신을 지운 후에야 보이는 옳은 하늘빛 날벌레가 왼쪽 눈을 향해 날아들었는지 일 초의 날카로운 통증에 찔끔 눈물이 났던가 내 몸에 깃들었던 까마득한 바다를 바다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말자 이제는 나무계단을 올라 다른 하늘을 날아야 할 때 목마른 매화가 피겠다 파도가 높아서 물자국이 얼룩진 결빙의 엽서를 꺼내 붉은 우체통에 넣는다 떠난 손바닥에 새, 바다를 담는다 냄새나는 손을 깨끗하게 씻으며 하염없이 손을 흔든다 저 곳으로 다시 저 먼 곳으로 우리는 매화를 멈추지 않는다 최서진 | 2004년 『심상』 등단. 문학박사. 시집 『아몬드 나무는 아몬드가 되고』 『우리만 모르게 새가 태어난다』. 2018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김박은경 - 노엘 노엘 보라색 장화를 신은 그녀는 검은 패딩 점퍼에 황금빛 브로치를 단 그녀는 농게처럼 부푼 엄지손가락에 밴드를 감은 그녀는 억지로 접힌 베개처럼 앉은 그녀는 이마에 뺨에 손등에 검은 꽃이 무성한 그녀는 끓는 기름 속을 어지러운 개수대 물통 속을 산해진미의 찌꺼기 속을 헤매느라 슬플 일도 울 일도 없이 밭은 숨을 이고 지고 가자, 그래 가느라 길고 긴 하루씩 질기게 버텼을 텐데 4분의 4박자로 연신 울리는 전화도 받지 않고 코도 골지 않고 잠꼬대도 하지 않고 입은 약간 벌어져있는데 성탄이라 신의 아이를 낳는 꿈이라도 꾸는 걸까 탯줄을 목에 걸고 지쳐버린 만신창이를 기어코 밀어내려는 걸까 내일의 최악이 오늘의 최선이라면 그게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면 어이없는 우연에라도 기댄다는 걸까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김명서 - 유리병 속의 혀 유리병 속의 혀 X의 친절에는 독이 숨겨져 있었다 못질 한번 없이 진리의 집을 짓는 성자의 모습에 발을 들여놓고, 줄기차게 떠들어대던 상생과 정의 의로운 언어 뒤에 숨은 혀로 살생부를 찍어낸다 나의 둥지에도 복화술 암호를 심어놓고 한물간 정보와 낙서까지 해킹해 갔다 금간 감정선을 땜질하고 우그러진 곳을 펴보려 했으나 만성질환이 되어버린 불신은 불안으로 뒤바뀌고 더욱 캄캄해져만 가는 대낮 햇빛을 찾아 더듬거리는 내게 X가 쏜 독설이 환상통인 듯 늑골을 파고든다 X는 훔쳐낸 정보를 망상의 페이지에 끼워 넣고 화려하게 각색을 하고 날개까지 달아놓았다 진원지를 떠난 소문에 점점 가속도가 붙는다 소문이 지나간 허공에 뒹구는 허구의 입자들 한 번쯤 자신의 궤적을 돌아봐 도대체 어떤 악령을 섬기는지 더는 자신을 그르..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임솔내 - 하이바이, 19 하이바이, 19 섬처럼 사느라 엄마를 내다버린 곳에 가지 못했다 허연 칠순의 아들이 구순의 어미를 음압병동으로 옮기는 걸 멀리서 바라만 보는 모습 티비에 뜬다 꿈처럼 자꾸 도망가라 멀어져라 혼밥으로도 이미 아득해졌을 길 헤지고 굽어진 길 어귀에서 서로 기다릴텐데 눈에서조차 멀어지면 어쩌자고 꽃은 자꾸 떠서 지고 있는데 이제 가야지 엄마 버린 곳 임솔내 | 1999년 『자유문학』 등단. 시집 『나뭇잎의 QR코드』. 영랑시문학상 등 수상.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문화 칼럼니스트, 한국시낭송총연합 회장,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손택수 - 요즘의 실어증 요즘의 실어증 젖가슴이란 말을 쓰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내 시에서 습관이 된 말들, 젖가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볼멘소리가 가래처럼 끓어오르지만 가려운 목청을 애써 눌러 참는 젖가슴은 언제부턴가 내겐 하나의 금기어다 젖가슴을 따라오던 달이나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 같은 이미지들과 이별 연습을 하게 한다 그건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 덜 마른 매미 허물이 뜯겨 일어나는 일, 허나 달도 해변도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모래알을 씹는 혀로 쓰다듬는 사구가 새로 생겨난다 나의 사구는 흐름을 멈춘 적이 없는 육체다 솟고 가라앉고 포복하고 날아오르며 한 알의 뒤척임이 사막 끝자락을 펄럭이게 하는 백지 앞에서 나는 말을 처음 익히는 아기로 돌아간다 백지의 젖가슴에 안겨 수유를 다시 시작한다 이 경이야말로 잃어버린 고통과 두..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김윤 - 안좌 안좌 내 혈관 속 소금은 갯벌하고 같아서 바다 냄새가 나면 신기가 돌기도 해 정월 당굿이 섬 어디서 무명처럼 풀리고 있겠네 뱃길로 훌쩍 가고 싶던 신안군 안좌면 다리로 건너 골목 어귀 밥집에 앉아 백반을 먹네 건너 쪽 담벼락에 화가 김환기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새겨있어 저 담장 안이 친구 집이겠지 어디서 무엇이 되어 이미 만나버린 늙은 남자들이 수굿하게 앉아 밥 먹는 걸 보네 내 속에 안좌 같은 섬 한 채 있어서 술잔 같이 낮게 잠기는 목소리 큰 기와집 마루에 걸터앉아 멀리 배 들어오는 기척이 다 보이는 녹청 같이 파란 바다를 보네 제 고통이 출렁이고 밀려가는 것을 사람들이 너울이라고 했지 김윤 |1998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지붕 위를 걷다』 『전혀 다른 아침』.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최순향 - 입춘 입춘 겨울 속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봤습니다 두 손이 시린지 주머니에 넣습니다 목련이 가슴 부풀어 터지는 아침입니다 겨울로 걸어가는 한 여자를 봤습니다 꽃다발 풀어헤쳐 길에다 뿌립니다 떨어진 그 자리마다 얼음꽃이 핍니다 해질녘 봄 바다는 노을을 끌어안고 여자와 그 남자는 노을 위에 눕습니다 파도는 비단 말듯이 일렁이며 말아갑니다 최순향 | 1997년 계간 『시조생활』 등단. 시조집 『긴힛단 그츠리잇가』 『옷이 자랐다』 『행복한 저녁』(영역) 등. 국제PEN한국본부 시조문학상, 한국문협 작가상, 시천시조문학상 등 수상. 세계전통시인협회 한국본부 부이사장, 한국여성문학인회 부이사장, 계간 『시조생활』 주간.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임병숙 - 타국에 있을 너는 타국에 있을 너는 한 점 구름처럼 없던 인연으로 지워질까 한곳에 머물지 않는 것이 바람뿐이랴 뒷모습 보이지 않으려니 속맘에 믿었던 내게 이별 찍고 돌아선 너도 세월 품고 살아가겠지 곳곳에 네 추억 묻은 흔적 아픔이 될 줄은 흐르는 물살 따라 어디쯤 머물러 정리되면 가끔은 너 또한 아쉬움 섞이겠지 꿈에라도 웃음 흘리며 다가오면 우린 속없이 울며 반기겠지 임병숙 | 1996년 『순수문학』 등단. 시집 『하얗게 하루가 열리는 소리』 등. 소설 『바람의 길목에 핀 아네모 네』 『시작의 날개』. 순수문학 대상, 좋은문학 대상, 영랑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