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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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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윤복선 - 지킬 수 없는 약속 지킬 수 없는 약속 형제는 마른땅에 의미 없는 반복된 발장난을 하고 있었지 하늘에는 별 하나 없이 자꾸만 어두워져 갔어 휭하니 흙먼지를 남기고 떠나가는 버스 뒤로 나뭇잎 하나 따라가다가 지쳐서 뒹굴고 느려진 발장난이 눈물로 바뀌기 전 저기 달려오는 마지막 버스 한 대 쿵쾅대는 어린 가슴위로 내릴 사람 없는지 멈추지도 않고 달렸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둠을 차고 걷는 나는 8살 동생은 6살 먹먹함과 막막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교차하는 어린 나에게 할머니는 또 내일을 얘기하셨고 그 밤에는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았어 그래도 날이 밝아지면 또 기다리는 열 밤만 자고 올게 엄마의 약속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오십이 넘은 지금도 퇴근길 정거장에 서면 구두 밑창을 뚫고 올라오는 회갈색 마디마디 붕대로 감아놓은 생채..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심웅석 - 이름 없는 시인의 묘(墓) 이름 없는 시인의 묘(墓) 영혼은 양지바른 산자락에 앉았네. 고명 시인들의 시말을 아 무리 뒤적여도 시알이 떠오르지 않았어. 무명이면 어떤가 영혼 에서 깨끗한 가닥으로 뽑아 집을 지었으면 그만이지. 이 정갈한 집에 앉아 봄을 잃은 설움에 잠겨 있으니, 노란 산수유가 귀를 쫑긋 옆에 매화도 방긋 웃고 앞쪽 이팝나무 마른가지에 앉은 까 치도 봄소식을 전해 주네. 파란 하늘에서 낮달도 손 흔들어 주 니 서러운 마음 구름처럼 흩어지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내 집에 좀 쉬어가라 청하지 않아도 외롭지 않아. 바람 부는 벌판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의연 히 내 길을 걸어오지 않았나. 그대 먼 길을 자주 찾아올 필요 없 어 어둠이 내리면 하늘의 별을 통해 우리 안부를 전하지. 조용 히 옆에 앉은 할미꽃에게 내 ..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신두호 - 해변이 나타나는 사람 해변이 나타나는 사람 선을 보여주려 하는 사람에게는 점의 세계가 남아 있다 내려다보면 어디든 발밑의 그곳엔 모래 뿐 발목에서 한 사람이 시작되려 할 때 모래는 점이 되어 그려지지 않은 선들을 기다린다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는 점으로 보이니 더 이상 나뉘지 않는 몸이란 하나의 세계 주어진 재료와 도구로 선을 만들어 내려면 정교하게 빚어진 성이란 얼마나 충격에 취약한지 직접 만들어 보면 안다고 한 사람은 생각한다 두 다리로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을 것만 같다 다리와 다리가 교차하는 그러한 행위에 더 이상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선을 보여주려는 한 사람은 모래 위에 앉아 그려 본다 모래뿐인 공터를 백사장이라고 부르면 백사장을 이루고 있던 것들이 자신에게 떠오른다 몇 개의 빛나는 삽과 푸른 빛깔..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이해원 - 살아있는 무늬 살아있는 무늬 열차 안, 뱀가죽 백을 든 여인이 옆에 앉는다 꿈틀거리는 무늬, 소름이 내 손등을 타고 오른다 사람 키를 훌쩍 뛰어넘는 길이, 자바섬의 비단뱀은 비단 같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밥이다 화려한 무늬가 천적을 부른다 훈장처럼 뱀 이빨자국을 팔뚝에 새긴 땅꾼들은 잡뱀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위장술과 나무 타기에 능숙한 비단뱀, 나무 위로 몸을 숨겨도 예민한 귀를 가진 그들 잠잘 때도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둔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풀잎이 흔들리는 곳으로 달려가 맨손으로 대 물을 덮친다 엎치락뒤치락 터질 듯 조여 오는 죽음의 공포 숨이 가쁘고 서늘한 피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도 밥이 새지 않게 조심조심 비늘 하나라도 다치면 안 된다 결국, 머리를 잡은 쪽이 승자다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던 마대가 ..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박옥임 - 염원 염원 시간은 바람처럼 날리는데 설마라는 안일함이 불러 올 그 뒷모습 빛이 멀어지며 바람의 온도 떨어지고 청청했던 날들 바스스 사라져가니 작은 불씨라도 키워야 할 시간 생각들이 모여 마음을 열고 열정을 모아 타올라야 할 때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 여덟 …… 한 곳을 바라보며 활활 하늘 끝 닿으리니 박옥임 | 2012년 계간 『문파』 등단. 시집 『문득』.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김재근 - 선탠 선탠 밤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어 치마가 자꾸 올라갔다. 아무리 애써도 내려지지 않아 할 수 없어 공원을 올랐다. 누구도 없었고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공원등이 깜박거렸다. 그림자가 길게 생겼다 사라졌다. 눈을 감으니 그림자는 뚜렷해졌고 눈을 뜨니 그림자는 친근하게 다가왔다. 몸이 뜨거워졌다 핸드폰이 울렸다. “여기 날씨가 너무 좋아 산책하고 있어” “나도 지금 산책 중인데 여기는 머리카락이 마구 날려” “왜 날려?” “바람이 많이 불어” “제프, 길 건너 스톤 브리지 알지? 거기 노천에 사람들이 알몸으로 누워 선탠을 해. 햇볕에 살을 마구 태우고 있어.살타는 냄새가 여기까지 날 정도야. 고양이 눈알이 검은 것도 선탠 때문인 거 같아. 근데 더 재미난 건 내가 그 다리 위를 걷는데 노을이 지고 있었어” ..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박성준 - 두진이에 대한 고정관념 두진이에 대한 고정관념 꿈에 다시 두진이가 찾아와서 초인종을 눌렀음 집을 어떻게 알았냐고 나는 화를 내고 있었음 두진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초인종을 또 눌렀음 그러니까 이 장면은 계속 되풀이되는 내 꿈의 이야기임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았던 아이들은 하나둘씩 개명을 했었음 건호로 개명한 알찬이 별명은 알찬 제비 주영이로 개명한 신나라 별명은 아이 신나라 문교로 개명한 정두진 별명은 두부감빠였음 이름만으로 잘 자라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친구들은 개명을 하고 나서도 꼭 한 가지씩 별명을 가지고 살았음 이름이 여럿이라는 건 굉장한 인기의 척도이자, 노력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분명히 각인될 수 있는 냉정이었음 건호가 된 뚱뚱이 알찬이는 이제 건빵이 되고 주영이가 된 큰 바위 얼굴 신나라는 부엉이가 되고 지적장..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이서화 - 회전초 회전초* 티브이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구르는 것에 멈춘다 아니, 풀들의 축구 경기를 본다 선수는 각 방향의 바람들이고 굴러다닐 수 있는 모든 곳이 그라운드 처음엔 마른풀 한 자락으로 시작해서 공은 둥글게 뭉쳐진다 바람에 얽혀 빵빵하게 든 공은 잘도 굴러간다 점수체계와 상관없이 승패 없는 경기를 끝도 없이 하는 건기의 승리욕이란 정처 없음의 절정이 아닐까 회전초, 풀이라 하기엔 너무 말랐다 어쩌면 마른 들판이 건초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풍경일지도 봄밤에 가을 토너먼트를 본다 때로는 우르르 사막에도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생존을 위해 씨앗을 뿌리며 구른다 아무데서나 멈추다 다시 구르는 바람이 멈추는 곳이 골인 지점이다 * 회전초 : 뿌리에서 분리되어 바람에 굴러다니는 식물의 지상 부분으로, 뿌리가 없이도 식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