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그림
결혼 47주년이라 삼척으로 여행을 갔다. 코로나 19로 세월이 수상한데 내 옆의 현실에서도 기막힌 슬픔을 바라보아야 하는 일이 생겼다. 외손녀가 갑자기 아파서 마음을 졸였다. 손주들이 방학이 연기되어 집에 있으니 두 아이들 돌봐주는 것도 힘든데 나들이를 못하니 답답해해서 떠난 여행이다. 동해 바다는 여전히 거기서 많은 말을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삶이 견딜 수 없고 힘들 때 ”여행은 마음껏 할 수 있다’는 말이 가슴으로 훅하고 들어왔다. 항공사에 다니는 남자의 말이니 가능할 것 같았다.
20대 초반, 사는 게 녹녹치 않아 방황하고 있을 때 일간지의 ’오늘의 운세‘를 즐겨 찾아보곤 했다 그러다 “ 동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날 수 있다.”라는 문구를 보는 날은 은근히 누가 귀인일까 하며 두리번거렸다. “여행” 그 말은 나를 설레게 했다. 재보고 따져 볼 것도 없이 그 말에 나의 마음을 빼앗겼다. 그 남자가 귀인처럼 보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준비 없이 시작되고 감정은 재앙처럼 다가왔다.
2월 말에 졸업하고 3월 17일에 결혼을 한다고 했으니 아버지는 노발대발 화를 내다가 대학원에 보내 준다고 회유를 하다가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라고 막무가내로 떼쓰는 철없는 맏딸을 보내 주었다.
날개는 신비와 힘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남자의 따뜻한 그늘, 날개아래 붙어서 같이 날고 싶었다. 그러나 결혼은 현실이었고 곧 나의 환상은 깨져 버렸다.
수없이 여행 가방을 매거나 벗었다. 여러 나라의 골목을 헤매고 다녔지만 해답은 보이지 않았다. 체념과 포기와 인내만이 나의 몫이었다. 맏며느리와 맏딸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림 한 점을 볼 여유가 없었고 음악회 한 번을 갈 수 없었다.
결혼한 지 20년이 지나서 처음으로 나의 방을 갖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욕망이 클수록 실망도 컸고 자신감은 바닥을 치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때 우연히 영국 화가 월터 랭글리의 <슬픔은 끝이 없고>라는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 그림은 ‘위로’를 주제로 한 그림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고 한다. 뒤쪽으로 보이는 바다는 잔잔하고 등대에 불은 들어왔는데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는 여인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늙은 여인은 말없이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조금 더 나이든 여인도 이미 겪어본 고통이다. 깊은 슬픔이 흐른다. 시간이 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겠다. ‘기다리자 기다려보자 언젠가 이 슬픔을 대신할 것이 찾아오지 않을까’ 여인의 흐느낌은 더 커지는 것 같은데 ...
그 후 나는 힘들 때마다 랭글리 그림을 찾아서 보곤 했다. 어느 날은 그저 눈물만 주르륵 흘려도, 어떤 위로의 말보다 나에게 많은 위안을 주었다.
랭글리(walter langley 1852~1922), 그는 뉴린이라는 어촌에 정착한 후 어촌의 가난한 일상과 힘겨운 삶 그리고 가족에 대한, 특히 모성에 관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림에 눈물과 한숨을 담아낸 화가였다고 한다.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사진을 찍다보니 우리 부부의 그림자가 모래사장에 비춰졌다. 남편의 내려앉은 어깨와 구부정한 내 모습을 보니 잠깐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힘들었지... 그래도 그림자를 잃어버리지 않고 잘 살아 오지 않았는가. 남편의 날개는 부러지고 아파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지만 지금은 내 손을 붙잡고 가고 있다. 슬픔은 거대한 것이다 누군가의 슬픔에 간섭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옆에 있어 주는 수밖에 없다. 부부란 그런 존재인가 보다.
정훈모 | 2001년 『자유문학』 등단. 이화동창문인회 부회장. 저서 『시장에서 영희를 만나다』 『부엉이 집을 얻다』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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