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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0년 여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수필마당] 정훈모 - 인생의 그림

 

인생의 그림

 

 

결혼 47주년이라 삼척으로 여행을 갔다. 코로나 19로 세월이 수상한데 내 옆의 현실에서도 기막힌 슬픔을 바라보아야 하는 일이 생겼다. 외손녀가 갑자기 아파서 마음을 졸였다. 손주들이 방학이 연기되어 집에 있으니 두 아이들 돌봐주는 것도 힘든데 나들이를 못하니 답답해해서 떠난 여행이다. 동해 바다는 여전히 거기서 많은 말을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삶이 견딜 수 없고 힘들 때 여행은 마음껏 할 수 있다는 말이 가슴으로 훅하고 들어왔다. 항공사에 다니는 남자의 말이니 가능할 것 같았다.

20대 초반, 사는 게 녹녹치 않아 방황하고 있을 때 일간지의 오늘의 운세를 즐겨 찾아보곤 했다 그러다 동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날 수 있다.”라는 문구를 보는 날은 은근히 누가 귀인일까 하며 두리번거렸다. “여행그 말은 나를 설레게 했다. 재보고 따져 볼 것도 없이 그 말에 나의 마음을 빼앗겼다. 그 남자가 귀인처럼 보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준비 없이 시작되고 감정은 재앙처럼 다가왔다.

2월 말에 졸업하고 317일에 결혼을 한다고 했으니 아버지는 노발대발 화를 내다가 대학원에 보내 준다고 회유를 하다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막무가내로 떼쓰는 철없는 맏딸을 보내 주었다.

날개는 신비와 힘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남자의 따뜻한 그늘, 날개아래 붙어서 같이 날고 싶었다. 그러나 결혼은 현실이었고 곧 나의 환상은 깨져 버렸다.

수없이 여행 가방을 매거나 벗었다. 여러 나라의 골목을 헤매고 다녔지만 해답은 보이지 않았다. 체념과 포기와 인내만이 나의 몫이었다. 맏며느리와 맏딸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림 한 점을 볼 여유가 없었고 음악회 한 번을 갈 수 없었다.

결혼한 지 20년이 지나서 처음으로 나의 방을 갖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욕망이 클수록 실망도 컸고 자신감은 바닥을 치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때 우연히 영국 화가 월터 랭글리의 <슬픔은 끝이 없고>라는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 그림은 위로를 주제로 한 그림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고 한다. 뒤쪽으로 보이는 바다는 잔잔하고 등대에 불은 들어왔는데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는 여인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늙은 여인은 말없이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조금 더 나이든 여인도 이미 겪어본 고통이다. 깊은 슬픔이 흐른다. 시간이 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겠다. ‘기다리자 기다려보자 언젠가 이 슬픔을 대신할 것이 찾아오지 않을까여인의 흐느낌은 더 커지는 것 같은데 ...

그 후 나는 힘들 때마다 랭글리 그림을 찾아서 보곤 했다. 어느 날은 그저 눈물만 주르륵 흘려도, 어떤 위로의 말보다 나에게 많은 위안을 주었다.

랭글리(walter langley 1852~1922), 그는 뉴린이라는 어촌에 정착한 후 어촌의 가난한 일상과 힘겨운 삶 그리고 가족에 대한, 특히 모성에 관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림에 눈물과 한숨을 담아낸 화가였다고 한다.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사진을 찍다보니 우리 부부의 그림자가 모래사장에 비춰졌다. 남편의 내려앉은 어깨와 구부정한 내 모습을 보니 잠깐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힘들었지... 그래도 그림자를 잃어버리지 않고 잘 살아 오지 않았는가. 남편의 날개는 부러지고 아파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지만 지금은 내 손을 붙잡고 가고 있다. 슬픔은 거대한 것이다 누군가의 슬픔에 간섭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옆에 있어 주는 수밖에 없다. 부부란 그런 존재인가 보다.

 

 

정훈모  | 2001년 『자유문학』 등단. 이화동창문인회 부회장. 저서 『시장에서 영희를 만나다』 『부엉이 집을 얻다』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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