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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0년 여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수필마당] 유혜자 - 당신의 벤치는

 

당신의 벤치는

 

거리를 지나노라면 곳곳에 놓인 벤치를 만날 수 있어서 나이든 처지에 반갑기 그지없다. 우리 아파트 입구에도 푸른 벤치가 놓여 있어서 들고 날 때마다 학창시절 동급생의 시구(詩句)가 생각난다.

 

맨 먼저 누가 꽃을 불러주면/꽃은 /터질 듯 분홍 손수건에 싸여/푸른 벤치로 다가간다./꽃은/우리가 가장 아파하고 우리 제일 서러워하는/…

-w시인의 <꽃을 위한 시>중

 

재학 중 시인으로 등단하고 예쁜 클라스메이트와 캠퍼스 커플로 알려져 주위의 부러움을 샀던 이 시인. 나는 이 시가 우수한 시로 평가받은 내용보다도 푸른 벤치라는 단어가 참신하여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벤치는 서 있거나 오래 걸어서 피곤한 사람이 쉴 수 있고 의자와 달리 복수로 수용하여 만남의 장으로 대화가 허용되는 곳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푸른 벤치에서의 만남은 신선하고 젊은이끼리의 만남이 연상되는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벤치는 무언가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슬픈 소원과도 무관하지 않기에 외로운 곳이라는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재작년,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 갔을 때 현지인이 서쪽에 있는 합살루라는 휴양지에 가보라고 권했었다. 그곳은 14km에 이르는 해안선이 아름다워 발트해의 베네치아로 불리고 차이콥스키가 앉아 석양을 감상했던 의자가 있다고 했다. 일정에 쫓겨서 가보지 못하고 후일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그 의자는 등받이가 있는 긴 석조 벤치였다. 등받이 윗부분 중앙에는 차이콥스키의 초상화, 등받이 양쪽에는 악보가 그려져 있다. 차이콥스키가 생전에 앉았던 벤치인지, 사후에 기념하려고 만든 건지는 알 수 없으나 그곳에 앉아 붉게 타는 석양을 보며 어떤 영감을 얻어 작품에 반영했다면 그것도 창작의 벤치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바다로 향해 있는 그 벤치를 바라보다가 떠오른 노래가사가 있다.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의 자리가 돼 드리리다. 피곤한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을 편히 쉬게 하리다.…”는 장재남의 가요를 생각하며 이 나이가 되도록 남에게 휴식과 의지가 되는 의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못해본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차이콥스키는 벤치에 앉아서 떠올린 영감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여 위안과 평화, 휴식을 주었으니 어쩌면 만인의 의자, 벤치가 되어준 것이 아닌가.

최근 바르샤바에 다녀온 이에게서 들으니 2010년 쇼팽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최고급 화강암으로 곳곳에 쇼팽의 벤치를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 벤치에 앉아서 버튼을 누르면 쇼팽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휴대전화를 바코드에 갖다 내어 음악을 내려 받기도 한다. 저마다 다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벤치가 바르샤바 시내 15곳에 설치되었다니 쇼팽이 어린 시절을 보낸 도시에서 일반인들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 수 없겠다. 쇼팽의 벤치 빛깔은 검은 색에 가깝다지만, 내가 젊은 시절 푸른 벤치를 상상하고 꿈꾸던 것이 일부 현실화된 듯하여 반갑기도 하다.

학창시절 우리가 선망했던 ‘푸른 벤치’시를 쓴 친구는 시인으로서 문학적 성취보다도 출판계에서 성공했는데 일찍이 파산해서 소식을 아는 사람도 없다. 그야말로 벤치가 되어준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나의 집에는 의자가 세 개 놓여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요, 또 하나는 우정을 위한 것이요, 셋째 것은 사교를 위한 것이다.” H.D. 소로우가 『숲속의 생활』에서 한 말인데 의자를 벤치로 바꾼다면 당신은 어떤 벤치를 택하여 놓을 것인지 묻고 싶다.

 

 

 

 

 

유혜자 | 1972년 『수필문학』 등단. MBC 라디오PD, 방송위원회 심의위원, 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역임. 수필집 『꿈의 위로』 등 11권, 음악에세이 『음악의 에스프레시보』 등 5권. 한국문학상, 조경희수필문학상, 흑구문학상 외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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