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마당/2020년 여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수필마당] 이흥수 - 사월은

 

사월은

 

찬란하고 서러운 사월이다. 동면에서 아직 덜 깬 불안한 삼월을 따돌리고 여기 저기 환한 꽃소식과 함께 완연한 봄으로 돌아왔다. 묵정밭에도 새싹들이 파랗게 고개를 내밀고 헐벗은 나뭇가지마다 연녹색 새잎으로 옷을 갈아입느라 분주하다. 누가 사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겨울이 쉽게 물러 설 수 없는지 며칠째 강원도산간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모처럼 피어난 여린 꽃잎들은 화들짝 놀라 서럽게 떨어지고 피멍이 들었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혼란한 세상이지만 사월은 푸르른 오월로 가는 징검다리다.

사월의 바람이 분다. 언뜻 스치는 바람결이 아직도 지난겨울을 내 마음처럼 놓아 주질 못하는 것 같아 애처롭다. 한식날에 함께 가자는 아이들의 말을 뒤로하고 이틀을 못 참고 굽이굽이 혼자 올라왔다. 모퉁이를 돌때마다 매번 알 수 없는 기대감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다다른 묘역에는 햇살이 환한 언덕에 고요한 침묵만 흐를 뿐이다. 평소에도 말이 없던 그 사람은 빙그레 반가운 미소만 보내는 모양이다. 누군가 나이가 들면 부부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뿐, 마음의 동행은 영원하다는 위로의 말이 마음 깊이 스며든다. 보고 만질 수는 없지만 늘 함께하는 나날이다. 오늘은 우리가 만나 서로를 바라보고 아끼며 함께 걸어가기로 하객들 앞에서 굳게 약속한 날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하게 되새김 되는 한바탕 꿈처럼 지나간 날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해 사월은 눈부셨다. 불어오는 봄바람에 취한 듯 세상이 온통 우리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고맙고 감사했다. 서로를 진지하게 알아 가는 과정도 신선하고 하루하루가 설렘과 축복으로 다가왔다. 부족하고 서툰 일상도 함께하는 사람이 있어 용기를 얻고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걸어갈 수 있었다. 나를 내려놓고 오로지 가족을 위해 사랑으로 살아가는 나날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조금씩 세상에 눈을 뜨고 가족이 늘어날수록 삐걱거리는 문짝을 맞추느라 토론도 해보고 수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사월의 날씨처럼 긴 기다림 끝에 찾아온 황홀한 꽃길을 조심스럽게 걷다보면 어느새 세찬 비바람이 불었다. 따뜻한 훈풍에 봄인가 하면 때 아닌 폭설을 만나기도 했다. 곡예 같은 나날 속에 서로 웃고 위로하며 더 굳건한 정으로 선물 같은 은혜로운 노년도 함께할 수 있었다. 까마득한 꿈속을 헤매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쉬운 햇살이 저만치 가고 있었다.

요 며칠 동네가 온통 사월의 꽃 잔치로 술렁거린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모처럼 용감하게 밤길을 나섰다. 한 줄기 비가 내린 벚꽃 길은 가로등 불빛 아래 한 폭의 수채화처럼 환상적인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가까이 있는 길이면서도 몇 해를 까맣게 잊고 살았던 광경이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게 다가온다. 나도 모르게 한참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걷고 또 걸었다. 주위는 어둑하고 불빛 속에 벌써 작은 꽃잎들이 바람 따라 여기저기 흩날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또 며칠이 지나면 거짓말 같이 이 화려한 꽃들도 조용히 눈에서 멀어지리라는 생각에 금방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슬퍼진다. 왜 늘 현재 보이는 이 순간만을 즐기지 못하는지 나 자신이 안타깝다.

어젯밤에는 세찬바람과 함께 비가 내린다는 기상청 예보를 들었다. 겨우 활짝 핀 꽃들이 밤새 무참히 떨어질까 잠을 설치고 아침이 되자 곧 바로 창을 열었다. 다행히 아직도 환한 꽃들이 일제히 반갑게 눈인사를 한다. 비바람에 시달리면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서있는 모습이 얼마나 대견한지 가슴이 뭉클하다. 어떤 경우에도 생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것은 신비한 은총이다. 사월은 싹이 트는가 하면 눈이 오고 꽃이 피면 비바람이 불고 급기야 꽃이 지는 우리의 삶을 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환희와 온갖 고난을 두루 거치고 새롭게 깨어나는 사월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희망의 달이다.

 

 

 

 

 

이흥수 | 2014년 계간 문파등단. 수필집 소중한 나날, 문파문학회 부회장.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