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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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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김소형 - 에덴 에덴 공가는 펄펄 끓는 눈 속에 있고 우리는 뜰에 앉아 이야기한다 사람이 없어야 평안하다면 천국에는 가지 않는 게 낫겠어 사람들은 자주 미끄러지고 우리는 가끔 사람 같아서 미안하다 영구차에는 버들잎 같은 영혼이 설핏 얼굴을 내밀고 있다 너는 삽을 들고 눈뭉치를 파낸다 어디선가 꽃부리처럼 에덴의 마음이 고꾸라진다 봄에는 버드나무를 심자 그가 놀라 봄이라니? 묻고 어떤 생물은 흰 빛에 파묻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김소형 | 201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ㅅㅜㅍ』 『좋은 곳에 갈 거예요』. 작란(作亂) 동인.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홍승애 - 봄이 오는 바다 봄이 오는 바다 가늠 못 하던 눈먼 시간 동면이 해빙으로 진입하는 빠른 행보, 하품 한 아름 출력 중이다 초록이 바람 사이로 얼굴 내미는 만연한 촉수를 돋아 올리는 생명의 더듬이들 봄바람 시려진 얼굴을 들면 간지러운 웃음이 굴러가는 바람의 손길 높이 나는 갈매기 소란스러운 수다가 만선의 기쁨, 파도 위에 가득한 꿈을 펼친다 화사하게 쏟아지는 봄이 하늘을 덮은 아련한 빛의 아리아 여울지는 가슴에 움트는 환희 꽃망울 잉태한 봄이 출산 중이다. 홍승애 |2009년 계간 『문파』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박성현 - 빙하기 빙하기 당신 두 눈에 서려 있는 얼음이, 먼 하늘로 스며들다 지쳐 우두커니 서 있는 노을 같았습니다 마음만 움켜쥐고 얼어버린 거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살얼음 졌으니 오늘만큼은 물러설 곳이 생긴 거겠지요 그렁그렁 남은 햇살을 손바닥으로 쓸어 모으고 가루약을 털어 넣듯 삼켰습니다 팔다리에도 얼음이 끼어 있을까요 당신은 자주 갸릉거렸습니다 밤새 뒤채면서 뜬눈으로 새웠습니다 매일 엄마의 먼 곳이 그리워 울다가, 울음까지 내려놓기는 서러워 마음만 얼렸던 걸까요 얼어붙은 마음이 며칠이고 몇 달이고 계속되는 밤이었습니다 불투명한 얼음도 당신 것, 그러니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그 두껍고 어두운 곳에서 당신을 녹일 햇살의 울음을 기다려야겠습니다 박성현 | 200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유쾌한 회전 마..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신미나 - 은하수와 청혼의 밤 은하수와 청혼의 밤 우리는 나아간다 밤의 한가운데로 호두를 반으로 쪼개 속을 파내고 호두껍데기를 타고서 이것은 방주 우리는 들어간다 밤의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속으로 오른 눈에 기쁨의 왼쪽 눈에 슬픔의 대천사를 보게 된다면 한쪽 눈은 감은 채로 떠내려가도 좋다 소음을 빨아들이는 공기의 순수한 에너지 공중에서 행성의 고리처럼 빛나는 반지의 둘레 원의 바깥에서 괄호가 되어 퍼져나가는 물결의 분위기를 이해한다면 키를 돌려 회전하는 별자리를 보았다면 당신은 그것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다 신미나 |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싱고, 라고 불렀다』.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김문주 - 시창작교실 시창작교실 - 은유에 관하여 한 계절이 방안에서 지나는 동안 꽃은 피고 관객 없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나는 방안에서 여전(如前)한 선생이었다 그 말을 하지 말 걸 그랬나 또 시간을 넘기기도 하고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꺼내놓기도 하다가 천변(川邊)을 걷는다 시인은 잘 보는 사람, 견자(見者)이기도 하고 잡풀이 우거진 택지지구 한편에서는 철골 건물들이 올라가는데 물가에서 잠맥질하는 오리들. 비유는 너머를 보는 능력 도대체 이곳은 어디일까 흰 복면을 하고 천변을 걷는 사람들 돌아온 방안에서는 강의도 어느새 끝이 나고 학생도 선생도 없는 피안(彼岸)의 교실 모니터 앞에서 나는 옛날처럼 생각이 많고 그 학생들은 저마다 사라져서 바깥은 온통 초록의 세상 김문주(金文柱) | 2007년 불교신문 등단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박서양 - 코로나 블루 2020 봄 편지 코로나 블루 2020 봄 편지 담장 밑 개나리 하마 어지럼증 담벼락에 철퍼덕 기대고 있노라 했다 산 중턱은 지천으로 깔린 진달래 피눈물 범벅 붉은 슬픔 칠갑을 했노라 했다, 목련나무 둥근 눈물 폭죽처럼 터뜨리다 상한 심장 쓸어내리며 땅 밑으로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고도 했다 기꺼이 어김없이 봄을 피워 내고도 비극의 달이라는 낙인들 겹겹이다 몸 둘 곳 모르고 웅크린 4월 고막 찢어져라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에 이리저리 몸서리치며 나뒹구는 공포의 버석거림, 그리고 쓸어 모아 눌러 담은 구덩이마다 처철 하게 부서지며, 생존 포기하는 검은 낙엽들 천지사방엔 늘어만 가는 처연한 몰락의 페이소스 검은 무덤들 19세기말 군중들에게 살해당했던 神 부활 이후 가장 침통한 표정 암울한 얼굴로 뚜거덕 뚜거덕 걸어오고 있다 박서..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백미숙 - 면회사절 면회사절 앵앵 울어대며 앰뷸런스가 쌩쌩 달렸다 산소호흡기로 가쁜 숨 헐떡거리는 남자를 껴안고 숨도 쉬지 못하며 달려온 종합병원 응급실, 살얼음 한기가 빙하의 얼음물을 끼얹은 듯 질식할 것 같은 집중치료실에서 새빨간 적혈구가 한 방울씩 떨어지며 남자의 나무등결 같은 살갗 속 실핏줄을 타고 얼어붙은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성급하게 달려오며 빨리 밖으로 나가주세요, 거칠게 여자를 밀어내는 의사의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면 회 사 절 굳게 닫혀버린 문에 붙어있는 까만 네 글자를 보며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제발 그 사람 좀 살려 주세요 은사시나무처럼 하얗게 질려있는 가냘픈 그 여자는 생피를 토해내듯 울부짖으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은 까치처럼 뼛속을 파고드는 놀라움과 슬픔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버..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송승환 - 테이블 Ⅱ 테이블 Ⅱ 그녀는 호텔 복도 끝에 앉아있다 내 붉은 머리칼을 향해 손을 뻗는다 나는 반대편 복도 끝에 서 있다 그녀의 벌어진 입술을 바라본다 12,756㎞ 테이블 사이에 두고 우리는 함께 있다 송승환 |2003년 『문학동네』 시 부문, 2005년 『현대문학』 평론 부문 등단. 시집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클로로포름』 『드라이아이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