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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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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박라연 - 어느 저녁에 어느 저녁에 새봄이 저물어 가는데 지난 가을의 국화시체들을 수습하는 시간 방치된 국화들의 뼈아픈 순간들을 화장시키는데 내 뼈아픈 시간들이 염치 좋게 타들어갑니다. 타닥타닥 떠도는 세상의 뼈들이 함께 타들어 가는데 어머니들의 향기가 낭자합니다 바람이 나의 후회를 멀리 아득하게 데려갑니다. 땅의 시간 속에서 어서 나오겠다, 와 끝까지 서 있어주겠다, 속에서 옥신각신하던 오늘의 해는 저물어, 저물어 내 인생도 저물어, 저물어 가물가물 그저 아름답습니다 박라연(朴蓏娟) |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빛의 사서함』 『노랑나비로 번지는 오후』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 등. 2008년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2010년 박두진 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학부문 대통령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김선진 - 아직도 내가 못가는 까닭 아직도 내가 못가는 까닭 내가 믿는 건 당신이 알겠기에 귀엣말이 아니래도 짐작하실 테죠 날이면 날마다 감춰도 비집고 나오는 하얀 서리로 엮어져 내리는 기다림 어릴 적 소꿉놀이 헝겊 조각보 정직한 그리움의 깃발 만들어 세상사람 모르는 무인도로 고동만 불면 떠나갑니다 그러나 아직도 여물지 않아 사나운 짐승울음 바다 다스릴 길 없어 돛대도 아니 달고 미처 노도 내리질 못해요 내가 믿는 건 당신이 알겠기에 귀엣말이 아니래도 기다리실 테죠 아직도 내가 못 가는 까닭을. 김선진 | 1989년 『시문학』 등단. 시집 『끈끈한 손잡이로 묶어주는 고리는』 『촛농의 두께만큼』 『숲이 만난 세상』. 시선집 『마음은 손바닥이다』. 산문집 『소리치는 나무』. 한국현대시인상, 이화문학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김보림 - 그 이후 그 이후 폐허처럼 텅 빈 껍데기 속을 작은 물결이 밀려와 이리저리 굴려 본다 너의 귀에 아직도 들리니 파도소리가 김보림 |1989년 월간 『문학공간』 등단. 시집 『사금파리의 꿈』 『꼬옥 돌아 갈란다』 『행복 한 점 더하기』. 영랑 문학상, 순수문학 대상 (시 부문), 기독교문학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정숙자 - 백구과극 백구과극(白驅過隙) 가드레일에 죽은 고양이가 걸쳐져 있다 어쩌다 저리 됐을까 누가 가져다 저래 놨을까 ……확인한 바 플라타너스 몇 잎이 말라붙은 나뭇가지였다 태풍에 찢겼나 보다 소용돌이치다가 끼었나 보다 작신 허리 꺾인 포즈를 하고, 너는 푸른 숨을 거두었구나 갈색으로, 검정으로, 아니 고양이로 변신했구나 난 풍장이 좋아 이 길과 저 하늘과 해 질 녘이면 늘 걸어오는 그대들의 말소리와 숨소리, 발자국 수북한 이 길을 나는 끝내 택했어, 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내 길동무, 한번 눈여겨 봐주지도 않았던 이파리들 가운데 한 잎이었던 잎, 무음이 돼버린 이제야 입 이 시대에 건성으로가 아니라 진정으로, 어둠으로 시를 쓰는 몇몇 시인이 있다 이 시대에 그 몇몇 시인이면 족하다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 등단...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상희구 - 春詞 春詞 딧산 버들가지에는 꾀꼬리의 노래 앞마당에는 복사꽃이 만발 마당에 떨어진 복사꽃은 쓸지 않고 그냥 두고 보기로 하고 딧산 꾀꼬리의 노래소리는 그냥 버들가지에 걸어두기로 하고 상희구 | 1987년 월간 『문학정신』 등단. 시집 『발해기행』 『숟가락』 『대구1~8집』.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김완하 - 각주구검 각주구검(刻舟求劍) 어머니 가신 가을 감나무는 낙엽을 떨구다가 마지막 한 잎은 더 곱게 물들여 남겨 두었다 까치밥 아래 뒷산으로 난 길 가장 깊은 뿌리 위로 내려놓았다 다음 해 봄 그 잎이 닿은 뿌리 제일 가까운 곳에서 맨 먼저 새 잎이 눈을 뜨고 일어나 어머니 소식을 가져 왔다 김완하 |1987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길은 마을에 닿는다』 『허공이 키우는 나무』 『집 우물』 등.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대전시문화상, 충남시협본상 등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김종희 - 이제야 알았네 이제야 알았네 내가 왜 주저도 겁도 없이 영원히 살고 싶다고 말했는지 이제야 알았네 생명의 주체인 나, 보이지 않는 나는 본래 죽기를 싫어하고 끝없이 살려고만 하고 살기만을 바라는 영원히 죽을 수 없는 우주가 멸한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영원의 실재가 한 말임을 몸은 잠깐이나 마음은 광대 하네 김종희 |1982년 『시문학』 등단. 시집 『이 세상 끝날까지』 『S부인은 넘어지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등. 시문학상, 크리스쳔문학상, 영랑문학대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가영심 - 마음의 그늘 마음의 그늘 햇빛의 허기마저 깊어지면 내 마음의 그늘도 더욱 서늘해진다 저무는 시간은 낯선 풍경들을 지워갈 뿐 누군가 낮은 발자국소리 이끌고 사라지는 골목길 저마다 올려보는 소망의 기도에도 삶의 아픈 흔적은 도처에 얼룩져 있다 눈먼 바람마저 제 울음 따라 갈 길을 나선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 온종일 앓아가던 그리움으로 들끓던 내 마음마저 서늘해진다. 가영심(賈永心)|1975년 월간『시문학』등단. 시집『저녁향기』『마음의 날개』. 시선집『거울 속 불꽃놀이』외 7권. PEN문학상, 한국현대시인상, 한국문협작가상, 한국문학예술상 등 수상. (현)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문협 자문위원, 한국현대시협 지도위원.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현대작가연대 지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