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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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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변이수, 박이영 - 3점 슛의 방랑은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3점 슛의 방랑은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맨발이 사회적 거리를 줄인다? 설득된 멜로디 소모된 은유이거나 달콤한 디저트 멀지 않은 곳에서의 풀 샷 꿈이 좋은 날의 사막은 달 속에서 잠을 잔다 편견의 가계도 큰 발의 규칙 신기루를 향해 뛰고 있다 잉여의 건포도알 대화창을 걸어둔다 목소리의 오차가 너무 커 노틀담의 곱추는 잠시 사라졌다 장애물이 길이 되는 무너진 대성당 거울 가까이 미사를 옆에 끼고 하느님의 모퉁이를 돈다 불면의 거리 폭풍고음 전력을 다한다 야자수, 의자, 스크래치 난 파도, 도미노 블록이 쓰러진다 나이프의 반란 팬데믹 출구가 없다 빛 속의 견과류 깨달음이 단단하다 아무도 열어보지 않는 지도 꽃의 거짓말이라 적는다 * 참여 작가: 빛과 터널의 화가 이채현 화백. * 이 시편은 2인 공동창..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이병률 - 면역 면역 서로 가까이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며 신(神)은 인간에게 채찍 대신 마스크를 나눠주었다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입을 가만히 두라는 뜻이었을까 소리를 들리게 하지도 말며 소리를 내지도 말라며 사람들을 향해 사람들은 두 번째 손가락을 세웠다 서로 얼굴을 비벼도 안 되고 국경은 넘으면 안 되고 잔재미들을 치워놓으라 했다 나눠 먹을 수 없으니 혼자 먹을 쌀을 씻었다 서로 떨어져 있으라는 신호에 재조립해야 하는 건 사람이었다 마스크 안에서는 동물의 냄새가 났다 어떤 신호 같은 것으로 체한 사람들이 집 바깥으로 나가기를 참아야했던 시절 몇 백 년에 한 번 사랑에 대해 생각하라고 신이 인간의 입을 막아 왔다 계절이 사라진 그해에는 일제히 칠흑 속에 꽃이 피었다 공기에 공기를 섞어봤자 시절은 시들어갔다 사람들은..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권현형 - 홍차를 함께 마시자고 말하고 싶었다 홍차를 함께 마시자고 말하고 싶었다 아직 감자는 익지 않았고 공복의 저녁은 위태롭다 별과 인간의 시간 사이에서 누군가 밤으로 입장하는 걸 망설이고 있다 먼 훗날의 일이 그립다 1400광년 동안 빛의 속도로 날아가 네게 닿는 건 기약할 수 없는 일, 감자가 익기 전의 일 긴 펜대를 사용해 전하고 싶은 말은 쿠르드족이 타고 다니는 노새의 허리를 닮았을 것이다 고단한 소금 자루의 하루를 견디느라 취한 말이 비틀거리며 만년설의 저녁을 건너가고 있다 문득 올려다본 구름이 문자나 문장 같을 때가 있다 오늘 구름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한쪽뿐인 날개가 되었다가 허리가 긴 펜대가 되었다가 설원에 찍힌 말 발자국이 되었다가 서랍 속 마른 꽃이 되었다가 갈피를 잡지 못해 병이 깊어간다 사선으로 잘려나간 채 가슴에 붙어 있는 ..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신영옥 - 굴뚝 재, 저 푸른 옷자락이 굴뚝 재, 저 푸른 옷자락이 가는 길은 멀고 험해도 오를수록 부드러운 푸른 옷자락 펄럭이며 반겨주는 산이 좋아라. 2020 올 봄, 코로나19가 세계국경을 넘나들며 사람만을 괴롭히는 바이러스 세상 허허로운 마음 받잡고 찾아온 내가 넘은 굴뚝 재 그 옛날 성황당은 오간 데 없고 그렇게 높고 높던 산 고개가 지금은 푸른 숲 우거진 고속 도로 변 1950년 6.25 쳐내려오는 인민군 따발총소리에 가방 하나 둘러메고 피난민속에 묻혀 황급히 넘어가던 고갯길 정상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온몸으로 막아서던 국군들의 혈투 오늘이 그때인양 70년 사무친 가슴이 쓰리다. 천지 가득 피어나는 꽃들의 향연에 버들강아지 진달래 개나리 생강나무 꽃동산 다람쥐 노루 고라니 토끼 뻐꾸기 산 까치 지저귀는 산새소리 작은 골짜기를 적시며 ..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신현락 - 부름 부름 어느 시간의 부름이 있어 구름 저편으로 연하게 밝아오는 초벌의 아침하늘에 출사표를 던지는가 저공을 귀얄처럼 쓸고 가는 날갯짓 소리 떼로 날아가는 기세 자못 힘차다 대륙간비행에 비책이 따로 있다고 해도 활공에는 간결한 비법이 상책인 것 가끔 어린 울음의 먹물을 뿌려놓고 오로지 돌아갈 때와 날아갈 지평선만 아는 바람의 붓질로 이어가는 운필의 전상서는 오직 극지에서만 받아볼 수 있다 저마다 깃 푸른 일심으로 가고 또 가는 것을 뜬구름 하나 사라진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기러기는 혼신의 힘으로 갈라지는 붓끝을 부여잡고 필생의 필치를 뿌리며 가는 것 어느 예인이 있어 떠오르는 해로 천명의 낙관을 찍을 수 있는가 기러기 날아간 구름 저편 하늘의 어디에도 소실점이 없다 신현락 | 199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김규은 - 백차를 기뻐한다 백차를 기뻐한다 찻잎에 빗방울 소리 대숲 흔드는 바람에 밀리듯 묻지도 않고 뛰어든 쭉나무 집 할머니 웃으신다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건네 주시는 수건 햇살내 나는 듯 고실고실 한데 닳아 뭉뚱한 손 마디가 눈에 밟혀 마음 쓰인다 일상인 듯 능숙히 따루시는 차 한 보시기 맑고 순한 백차(白茶)다 기뻤다 덖고 비비지 않아도 그윽한 향미 잎으로 피기 전 털복숭이 여린 속속잎을 저리 무뎌진 손끝으로 어찌 거두셨는지 자꾸 눈길이 가는데 훈김 나는 다향에 끌려 시린 눈 고쳐 웃으며 웃음 웃는 할머니의 손을 붙안고 순한 순수에 내가 잡힌다 덖고 비비지 않아도 그윽한 다향 백차를 기뻐하며 김규은 |1991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냉과리의 노래』등.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미래시시인회 회장, KBS 아나운서 역임.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함성호 - 물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 소쇄원(瀟灑園)에서 서로 폐 끼치며 사는 거다, 이 화상아 자미탄이 백일홍의 그림자로 여인의 붉은 치마처럼 너울거릴 때 어느 저녁은 올 것이다 그 저녁이 오면 모두의 선의를 뿌리치고 간 너도 어느 강변쯤에는 가 있겠지 나는 제월당에 누워 쥘부채를 멈추고 왼쪽 귀에는 계곡의 물소리를 담고 오른쪽 귀로 대숲의 바람소리를 흘린다 이 원림은 은근히 관능적이다 오곡문 담장 위를 타고 오르는 해찰 맞은 바람처럼 생은 통째로 개 혓바닥 같이 숨찬 것이었느냐? 나는 모르겠다 소쇄/소쇄/소쇄/소쇄/소쇄 춘삼월의 바람이 대숲을 쳐 靑竹春光에 날리는 저 대이파리들의 장하게 잎 부비는 소리를 듣는다 아아 너는 어느 개여울에 앉아 울고 있는 것은 아니냐, 우리가 지나온 그 좋았던 날들이 먼 수평면상의 궤적..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성윤석 - 삼월의 눈 삼월의 눈 눈이 왔을 때 삼월의 매화는 간지러운 듯 입 거품 모양이 되었다 눈이 왔다 눈이 내리는 나라가 아니라 눈이 내리는 동네에서 사람도 간지러운 듯 옆에 걷는 일행의 어깨를 털어준다 눈이 내리니 세상이 꽉 차는 느낌이다 나라까지는 필요 없다 눈이 내리니 아무도 침범 않는 눈이 내리는 동네면 괜찮은 밤이 온다 각자의 방에서 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소설을 쓰고 있다 쓰는 일은 기타를 치다 마는 것과 같은 일인가 눈이 내려서 삼월의 홍매는 입 거품을 내밀었다 이게 뭐지? 하는 건 다 운명에 가까운 거였다 성윤석 |1990년 『한국문학』 등단. 시집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공중묘지』 『멍게』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