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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여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김재현 - 어혈

어혈(瘀血)

 

 

여인의 무릎에

의원은 침을 놓는다

이곳이 아프시지요, 묻는다

병은, 바늘에 걸려들지 않는

영리한 물고기들

수면을 흔들며 튕겨 오르는 빈 찌처럼

침이 빠진 자리, 피는

겁먹은 아이의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다

어혈(瘀血)이 풀린 겝니다, 의원이

늙은 사내에게 말한다

여인을 업고 돌아와 사내는

그녀의 팔을 주물러준다 사내는,

좁은 단칸방에 앉은뱅이 상을 펼쳐

삭은 김치를 내어놓기도 하고

시금치를 무쳐 밥을 떠먹이기도 하고

빨래처럼, 뼈에 걸려 펄럭대는

그녀의 늘어진 허벅지에

구렛나루를 대어보기도 하다가

낡은 브라운관 안에서

열도의 지진 소식을 듣는다

신기하지요, 어머니 저 가느다란 땅에

저렇게 큰 울림이 있다니요

집 앞 연못에 작약을 심어야겠어요

어찌나 추운지 물결이 그대로 얼어붙었지 뭐예요

붉은 꽃이 다 피면 봄이 오겠지요

여인은 끄덕이며 남자의 주름진 이마를 매만진다

나를 업고 가다오, 나를

사내는 여인을 업은 채 연못가를 돈다

어머니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작약꽃을 선물로 줄 거예요 여인은 끄덕이며

사내의 등에 볼을 가져다 댄다

심장이 만드는

얼어붙지 않는 파문,

등이 넓구나

그러믄요, 아내가 생기면 업어줄 거예요

그러려므나

등이 축축해요 침자리에서

어혈(瘀血)이 또 흐르나봐요

그럼, 몸이 풀리는 게지

봄이 오고 있겠지요? 신부를 찾으러 갈까봐요

그러려므나, 나랑 함께 가자꾸나

그래요 봄이 오면은

봄이

오면은

 

 

 

 

 

김재현 |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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