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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2020년 겨울호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기획특집] 박용하 - 인간은 아무리 멀리 가도

인간은 아무리 멀리 가도

 

 

별은 멀고 인간은 가엷다

별은 깊고 가 닿을 수 없는 높이에서 빛난다

높은 것은 깊은 것

손 댈 수 없이 높은 것은 입 댈 수 없이 깊은 것

별은 너무 깊어 겸손을 모르고

별은 너무 높아 부끄러움을 모르고

인간은 여전히 오만하다

많이 건방지다

 

그가 사는 행성에서 문제는 인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문제적 동물은 인간이라는 동물

 

그럼에도 우리는 해의 자식들

달의 후손들

별의 조상들

우주 먼지의 후예들

 

해의 눈부신 시선과

달의 그윽한 호흡과

별의 눈부시지 않은 서광과 함께

한 없이 높은 것은 원 없이 깊은 것

 

별은 너무 멀고 인간은 너무 가깝다

별은 깊은 곳을 넘어 깊고

나는 곁에 있는 인간에게도 닿을 수 없고

인간은 아무리 멀리 날아도

자신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벗어나지 못 한다

자신의 조막만 한 그림자조차 벗어던지지 못 한다

행성의 공기를, 물과 불과 흙을 벗어던지지 못 한다

제 발바닥 밑의 속세와 머리카락 위의 세속을 벗어나지 못 한다

 

그렇다고 꿈꾸는 동물을 누가 말리겠는가

그들의 상상력을 체포할 수 있겠는가

대항해 시대처럼 우주의 대양을 누비며

낯선 행성에 첫 발자국 내리는 인류를 상상해요

누가 알겠어요

희망의 날갯짓이 절망의 발자국이 될지라도

상상력이 현실력이 되는 초유의 사태와 사건을

 

한 세기 전, 그 행성에서 초보 날갯짓을 시작할 때만 해도

중력을 벗어나게 될 줄 꿈이나 꾸었겠어요

그건 화성에서 차 마시는 일처럼 허황된 일

그러나 세상일은 모를 일

상상이 현실이 되기도 하지

 

한 세기 전, 우주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추측한 인류가 있었다지

한 세기 후, 그걸 증명한 인류도 있다지

 

하지만 인간은 아무리 멀리 가도

제 욕망, 제 이기심, 제 허영심을 벗어던지지 못 한다

아집에서 놓여나지 못 한다

 

탐욕과 폭력과 광기의 화신

그건 인간을 가리키는 말

 

편견과 무관심과 몰이해의 절정

그것 또한 인간을 가리키는 말

 

이중성과 양면성의 복잡계

식욕과 성욕과 권력욕 위에 세워진 왕국

그건 인간이라는 동물을 가리키는 말

 

때론 비겁하고

때론 야비하고

가까스로 사랑이라는 별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언어 하는 동물

그것 역시 인간을 가리키는 말

 

여전히 별은 멀리 있고, 눈 닿을 듯 멀리 있고

 

나는 여기서 죽어가고

죽어가기 전에 살아가고

살아가기 전에 살아남아야 하고

 

죽어가는 것들은

그 무엇보다 살아가는 것들이므로

지금 이 순간 영원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들이므로

 

왜 갈등하나

왜 아등바등하나 물어도 소용없다

인간이니까

 

왜 감정하나

왜 일희일비하나 시비 걸어도 소용없다

인간이니까

 

천체의 운행이 어떻게 되든 천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뜬구름 잡는 소리

우주 잡는 소리 할 바엔

곁에 있는 죽음에 몰두하리

죽어가는 강아지의 죽음에 몰두하리

그러기 전에 죽어가는 내 죽음에 골몰하리

죽어가는 세 번째 행성에 골몰하리

 

손 댈 수 없는 나라에서 별은 깜박이고

발 닿을 수 없는 나라에서 별은 반짝인다

 

머무는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흩어진다

결국 다들 퇴장하게 된다는 것

하지만 살아 있다

버젓이 살아서 계산서를 뽑고 있다

 

누가 해와 달과 별의 노래 따위에 관심을 두겠는가

 

눈앞의 사업에 골몰하기에도 하루가 짧고

그가 이익이 되는지

그가 배신을 때리지나 않는지 골몰한다

 

삶은 끼니 앞에 놓여 있고

달콤한 꿈보다 곯아떨어진 잠이 더 달콤하고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잊고 있을 뿐

해와 달과 별의 후광 아래

일상을 먹고 일상을 게운다

 

그렇다고 상상하는 힘을 그만 두기야 하겠는가

꿈을 폐기하기야 하겠는가

 

언젠가 그가 살던 행성 밖에서

그가 살던 행성을 바라본 적이 있다

생명과 죽음의 잔치가 한창인 세 번째 행성을

 

행성에서 멀어질수록 그것은 별처럼 아스라했다

가녀린 한 점 빛이었다

안위가 걱정됐다

 

별은 여전히 멀고 인간은 너무 가깝다

별의 향기는 너무 멀고 인간의 냄새는 너무 가깝다

인간은 아무리 멀리 가도

제 발바닥 밑을 오려내지 못 한다

아무리 우주를 탐험하고 고상 떨어도

발바닥 위에서 사랑하고

머리카락 아래에서 죽어간다

여기서 죽어간다

하루를 죽어가듯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하고

밥을 벌어야 하고

대출 이자를 갚아야 하고

일당을 벌어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해야 한다

별은 자중자애 할 필요 없이 높고

치욕 당할 필요 없이 깊고

인간은 일상이라는 천체에서

미움과 증오를 발산한다

인간은 아무리 멀리까지 날아도

자신의 입과 항문, 성기를 벗어나지 못 한다

화장실과 부엌, 침실을 달아나지 못 한다

 

여기서 이백삼십만 광년 떨어져 있는 은하?

어쩌라고!

 

우리는 여전히 지구계에서 산다

 

여전히 해가 뜨고 해가 진다

 

껴안을 수 없는 나라에서 별은 깜박이고

쓰다듬을 수 없는 나라에서 별은 반짝인다

 

별은 가 닿을 수 없는 그 사람처럼 아득하고

저 하늘에 무한을 두고 여기서 유한을 살찌운다

 

무한 너머 유한으로 살러 온 삶이여

유한을 탐닉하는 삶이여

 

오늘이라는 우주에서 살아가고

생활이라는 천체에서 죽어간다

 

해가 가기 전에

달이 가기 전에

날이 가기 전에

지금 이 순간이 가기 전에

 

 

 

 

 

박용하 | 1989년 『문예중앙』 등단. 시집 『나무들은 폭포처럼 타오른다』 『견자』 『한 남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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