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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2020년 겨울호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기획특집] 김효숙 - 호모필로포엠이 들려주는 별 이야기

호모필로포엠이 들려주는 별 이야기

 

 

피타고라스에게 별은 세계의 실재를 직관하는 매체였다. 루카치의 별은 신화 세계의 총체성 안에서, 칸트의 별은 양심의 지도 위에서, 윤동주의 별은 초자아의 자리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다. 도시에서는 이제 전류를 셧다운 하지 않는 한 별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동안 인류가 망각해 온 불길한 문명의 속성을 밤하늘이 증명한다. 인류가 꿈꾸던 신비한 우주가 과학 문명의 종착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곳에서 오는 빛을 볼 수 없어진 하늘을 향해 인류는 점점 머리를 들 이유를 잃어가고 있다. 그럴지라도 시인들은 별을 떠나지 않고 시를 쓴다. 상상력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에도 시는 과학처럼 우주까지 가 닿는다.

과학기술이 인류를 구원하리라는 교만한 믿음이 시인에게 없는 것은, 그들이 본래 바람이 빚어낸 목소리로 시를 읊고, 별과 달을 보며 유랑했던 족속이어서다. 별을 볼 수 없게 된 것이 별의 문제가 아닌,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한 지구의 문제라는 사실 때문에라도 시인들은 별의 이름을 부른다. 가속 장치로만 쓸모 있는 과학기술이 인류에게서 별을 빼앗아가자, 이전과 달라진 감정과 인식을 시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문명 이전과 이후의 별이 다르고, 현대의 최첨단 문명과 근대 문명기의 별이 다른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따라서 난해한 방정식과,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모를 숫자를 써넣어 시의 미감을 방해하는 현대시들은, 그 기호를 대입하여 천체를 읽어내야만 하는, 시인의 절박한 심정에서 나온다. 학문 분야에서 무거운 기호를 빌어와, 이제까지 감각해 온 별을 새로이 알아가려는 것이다.

망원경의 렌즈를 천체에 맞추지 않고도 까마득한 시공(時空)을 직관해 왔으나, 이제는 확대경의 눈을 빌어 별을 관측한 과학자의 기록을 시인들이 참고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철학자 베르그송이 엘랑비탈(élan vital)이라는 개념으로 생명의 본질을 꿰뚫었을 때, 그의 사유를 자극한 것은 그 시대의 온갖 새로운 과학 이론들이었다. 이 시대의 시인이 과학·철학 언어를 시에 전이시키는 것도 비슷한 내면을 갖는다. 학문 기호로 노래해야 할 만큼, 별은 이제 상상력의 최종 종착 지점이 되었고, 과학 체계와 인문학 교양, 시적 직관이 서로 침투하면서 고양된다.

별이 꿈이고 노래이던 이전 시대의 서정은 인간과 별의 정서적 교감에 맞춰졌었다. 이후 인류의 정신은 생명 기원의 비밀을 지식화하는 데로, 최근에는 인간의 두뇌 기능을 대체한 인공지능 문제로까지 진전되었다. 별을 우러렀던 마음이 자신의 기원을 알려는 욕구였을 때를 지나 인류의 지식 체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자신이 온 곳과 돌아갈 곳의 비밀을 극성스럽게 알아내려 했던 인간의 마을에는 이제 더 이상 별이 뜨지 않는다. 그런데도 시인은 변함없이 쓸쓸한 ‘의식’이 되어 별을 찾는다. 누군가가 의식할 때에만 별은 마음에서도 하늘에서도 돋아난다. 시인은 온몸으로 그 의식이 되어가는 사람이다.

 

 

 

따뜻하고 낮은 마음작용 ― 박제천의 시

 

시인에게는 빛도 어둠도 똑같이 심연일 때가 있다. 그곳의 법칙은, 오래 머무는 자를 영원한 조건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빛에다 어둠을 겹쳐서 보는 안목으로 시를 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시인은 별자리에서 서양의 궁수를 보고, 또 다른 시인은 동양의 풀메뚜기, 모랫벌로 기어드는 바다거북을 본다. 뒤의 시인은 서양의 궁수도 잘 알지만, 동양의 동물들이 활개 치는 별자리를 머리 위에 두고 산다. 이러한 탈(脫)인간중심주의가, 박제천의 동양풍 직관이면서 포스트휴머니즘의 내면이라는 사실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시인은 시력 50년이라는 장구한 시간 동안 줄곧, 우주를 삶의 바탕에서 생동하는 생명체들로 환치해왔다. 시의 표면 기호는 사사롭지만, 이면으로 접근해갈 때는 그 광폭에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박제천 시의 인격 배경은 처음부터, 조화성의 우주였다. 동아시아 철학과 접속하여 만물이 상응하는 조화 안에서 우주의 조각들에 눈을 맞춰 왔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율(律)』(문학예술사, 1981)에서 별 소재 연작시 36편을 펼쳐놓을 때 그가 꾀한 것은 “자연과 나의 습합”, 즉 물질과 의식의 통합이다. 이 프로젝트는 박제천 시정신의 이미 그러함, 즉 자연스러움에서 출발한 것이다. 서양 일색의 별 이름을 물린 곳에 온갖 짐승들을 불러들여 방목하면서, 그들이 머리를 둔 방향으로 지구의 방위를 열어놓는다. 중심축 없는 편재의 방식으로 이 세계를 현상하는 ‘흐름’의 시학이다.

 

별 몇 개쯤 수첩에 빠트려도 마음이 편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고
풀메뚜기 한 마리 찾아서 세계를 서른 몇 바퀴씩 돌아야만 합니다
별이여, 땅에 내려와 사는 메뚜기여 어떻게 너희들을 잊을 수 있으랴
확대경으로 들여다보이는 내 삶의 전신(前身), 벌거숭이
- 「심천 두 번째 여(女)」 부분

 

박제천은 본질과 현상의 문제를 일생 고민해온 시인이다. 그에게 별은, 우주라는 책 속의 무수한 기호 중 하나이며, 마음작용의 표상이다. 위 시에는 메뚜기라는 ‘현상’, 벌거숭이라는‘본질’이 겹쳐 있다. 현상 세계에서 메뚜기로 이름을 부여받은 존재자가 별의 다른 이름, 즉 시적 화자다. 현상이 본질을 앞서는 세계에서 이미지는 진리이지만, 그것이 바뀐 세계에서 이미지는 허상이다. 이름 없는 별들을 호명하여 지금 여기의 존재자로 지정해본들 이 작업은 좀체 종결되질 않는다. “돌대가리, 돌대가리, 돌대가리”라고 자책해보지만, 여전히 수많은 무명 씨(氏)들을 혼돈의 세계에 둬야 한다. 박제천에게 우주는 마음의 법칙을 따라 생겨났다가, 그것을 따라 사라지는 곳. 그래서 사물의 이름을 다 불러줄 수가 없다. 마음이 닿는 곳에 우주가 생기고, 마음을 물리면 그곳은 닫힌다.

과학은 법칙과 체계를 세워나가지만, 박제천은 그것을 용해한다. 그에게 별은 “둥글게 그려보면 모나게 생각이 되고 오각형으로 접다 보면 타원”(「심천 두 번째 심(心)」)으로 그려야 할 것 같은 가변체다. 허상의 틀을 만들려고 고투하던 화자의 작업은 끝내 궁리로 끝나고, ‘어린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별 형상을 간단히 오려낸다. 시인은 번잡한 생각에 갇혀 결정을 유보했으나, 아이는 지체하는 법이 없다. 투명하고 빠르게 세계를 직관하는 자유는, 무구한 마음에서 나온다. 시인은 줄곧 “신비한 빛”을 꿈꿔왔으나, 번잡한 허상에 집착하여 번번이 판단과 결정을 미룬다. 박제천은 사피엔스의 두뇌 작용도 일찍이 이렇게 사유했다.

 

내가 내어보내는 뇌파는 늘 일억 광년쯤의 거리에서 힘을 잃어버린 채 더 이상 가지도 되돌아오지도 못합니다 아무래도 내게는 그쯤 또 다른 별에 사는 내가 있어 그것을 제 것으로 삼아버리는 것같이 생각됩니다
-
「심천 첫 번째 우(牛)」 부분

 

인간 의식의 파동을 뇌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다뤄온 인류가 여기에 있다. 한번 방류한 의식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은, 병증도 판타지도 아니다. 박제천은 우주라는 책 속에서 파동하는 에너지를 정신 또는 의식 작용으로 미뤄 사유면서, 의식의 기원을 탐문한다. 시인에게 별은 “서른세 개”나 되는 마음의 하늘에 걸려 있으면서 “이상한 꿈을 꾸게 하는” 실재계다. 언어를 넘어선 그 세계는 감정으로도 이미지로도 표현할 수 없고, 시인도 그 세계를 다 알 수 없으며, 오직 어떤 본질과 관련되어 있다. 별 연작시 36편을 쓴 이후에도 박제천은 “어린 내가 받았던 별빛을 돌려주는”(「SF-퀘이사 별」) 마음으로 무명의 별들과 교신 중이다. 별이 결코 한 시대의 별이 아니듯, 박제천의 천체 상상력도 시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다.

 

 

지금 타오르는 것에 붙인 이름 이승하의 시

 

이승하 시에서 별은 서정의 표층, 즉 어떤 의식을 현상하는 매체다. 시인은 초기 시에서부터 별 현상학을 펼치면서, 사변을 걷어낸 자리에 경험적 서정을 담아 왔다. 서정이 이 세계를 얇게 압축한다는 관념을 쇄신하면서, 첫 시집 『사랑의 탐구』(1987)에서 시작한 별 현상학은 근래에 인공지능 상상력으로까지 진보하였다. 이승하의 초기 시에서 별은 삶의 약진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비의(悲意)와 소멸의 감정을 반사하는 물질이다. 시적 자아가 진정 바라는 것이 “쉼없이 타”오르는 별의 실존인 것을 보면, 그 이면의 소멸 감정도 무게가 만만찮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이 사는 세계에서 별은 “수십, 수백, 수천 광년” 전 출발한 기원의 빛이다. 1광년을 킬로미터로 환산하여 9,467,000,000,000을 괄호 안에 넣고, 까마득한 태초의 시간에 의식을 잇댄다. 지속하면서 지금 여기에 있어야만 ‘존재’한다고 믿는 세계에서 시인은, 물질인 별로 정신을 대리 표상해 나간다. 우주에서 오는 빛이 지구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몇억 광년을 경험하지는 못하지만, 빛이 지속하는 현상을 ‘별’로 명명하면서, 죽음을 비-존재의 상태로 알아온 것을 수정하기에 이른다.

다음 시구에서 보는 것처럼, 시인은 죽음과 이별을 지속성이 중단되는 상태로 알아 왔었다. “타오르는 것은 다 식는다 지금 빛나는 것은 다”(「지금 빛나는 것은 다」). 생명체 간 관계성의 사망을, 별이 뜨는 이유와 그것이 사라지는 현상으로 언명한다. 시적 자아가 아버지 극복을 위한 상징 궤도로 은하계를 구축한 때가 이때다. 아버지가 파괴의 세계라면 별은 복구의 세계, 아버지가 위계의 세계라면 별은 평화의 세계다. 어긋나는 현실에서 어린 자아는 다른 궤도에서 돌아가는 두 개의 공간을 일찍이 알게 되었다. 심지어 젊은 시인에게는 태양마저 파시즘의 현실이다. “미치도록 잠자고 싶”은 욕망, 진통제 없는 삶에의 갈구를 태양 부정으로 증폭시킨다. 현실은 빛을 소등하지 못하게 강압하고, 불면의 밤을 획책하는 외부 세계가 광기 어린 곳인 만큼, 시인은 그 모든 폭력의 방어기제로 퇴행을 욕망하기까지 한다. 시대의 폭력성이 시적 자아의 목소리로 울려 나오는 여기서 서정의 힘은 더욱 증폭한다(「빛의 비밀」, 『우리들의 유토피아』, 나남, 1989).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1991)에는 병색 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고립 상태를 보면, 외부에서 침투한 힘이 젊음을 소진시키는 정황이다. 빛이 그늘로 바뀌는 것은 ‘쓰러지는 태양’(「어두운 날의 주자(走者)」 때문이며, 현실은 식어가는 행성(「병실에서의 죽음」)과도 같다. 일상은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복용으로 찌들었고, 미친 혈육의 방황도 종결되지 않는다. 이 일들이 모두, ‘내가 진리’라며 삶의 궤도를 자기중심으로 바꿔 놓은 폭력 주체의 그늘에서 파생한 것이다. 이에 대한 시적 저항이 비유법 “조물주의 혓바늘”(「밤의 유희)」)이다. 폭력의 말로 점철된 세계, 음성 중심으로 진리체계를 세워온 폭력 주체에 대한 반발로 시인은 문자 중심의 세계를 열어나간다. 투쟁과 미움·표류·방황 때문에 이 세계는 아프게 건설되지만, 시인은 시를 쓸 수 있기에 삶의 이유를 알아가고 있다.

‘신’을 길게 늘여 쓰면 ‘시인’이 태어난다. 문득 다가오는 “꽃, 한 송이의 천체”(「꽃차례」)도, 시인이 쓴 기호로부터 열린다. 모든 연약하고 이름 없는 생명체의 제유, 광대한 우주로 치켜 올렸던 머리를 지상으로 떨굴 때에야 보게 된 꽃, 그리고 흙으로 만들어진 자신에 대한 자각(「흙에게」). 이것은 먼 우주를 돌아 자신의 자리로 귀환한 시인에게 주어진 고귀한 인식이다. 그때 시인의 눈이 향한 곳이 “먼지 속 세상 사람들”(「헌시(獻詩)」)이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의 눈은 새삼 밝아진다. 흙에서 나와 흙 위를 걸어가야 하는 인간에게 천명을 깨우쳐주는 시구다. 이렇게 이승하는 천상을 거쳐 지상으로 내려오는 인식 과정에서 “코스모스(cosmos)”(「물의 법(法)」, 『생명에서 물건으로』, 문학과지성사, 1995)를 ‘우주’와 ‘꽃’의 복합 의미로 쓰게 되었다. 『뼈아픈 별을 찾아서』(시와시학사, 2001)는 동양의 천체 인식으로 충만하다. 시·공간이 동시에 깨어나는 활기, 생명력의 활성화, 서로 어우러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별 현상으로 기원의 시간을 사유해오던 시인의 우주관이 동양의 조화로움으로 이행하고 있다. 이 시집을 크게 시간·공간·인간으로 구성한 것만 봐도, 시인은 세기말의 공포 속에서 인간의 실존과 여타 생명체의 존귀함에 대해 고민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인류가 남긴 마지막 시집이 될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서는 더더욱 절박하게 다가오는 생명 문제다.

 

천상의 별을 찾는다고 네 발밑에서
지렁이나 개미가 죽게 하지 말기를
통증을 느끼는 것들을 가엾어하지 않는다면
네 목숨의 값어치는 그 미물과 같지
- 「뼈아픈 별을 찾아서 - 아들에게」 부분

 

멀리 보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인류가 숭앙하면서 발밑의 생명체는 배제되었다. 이승하 시의 도약 지점은, 작은 생명체들에게 눈길을 멈추는 곳이다. 우주 공간에서 이미 죽은 별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자의 발밑에 깔린 개미 또는 짝을 찾는 벌레들(「아버지 뇌사 상태에 빠져 계시다」)이 거기에 있다. 생과 사의 교차지점에서 지금 듣는 우주 음향은 정작, 그간 하찮게 여겼던 벌레들이 내는 생명의 소리였다. 여인과 아기처럼 작고 연약한 존재를 ‘별’ 이미지로, 이슬람 국가를 폭격한 미군을 ‘태양’ 이미지로 그린 시(「순례자의 마지막 노래」,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 ̄혜초의 길』, 서정시학, 2010)에서는, 천체관과 세계 역사관이 만난다. 첨단 무기의 실험장이 된 약소국의 절망을 시인은 “별들이 다투며 길 안내를 자청”(「파미르 고원에서」)하는 순례길에서 마주한다. 혜초가 갔던 길을 밟아 보고, 붓다가 득도했을 때 눈 맞춘 이름 모를 별을 영원성의 상징으로 그려낸다(『불의 설법』, 서정시학, 2014).

급기야 우주에서 가장 작지만 큰 깨달음을 안긴 별을 발견하게 되고(『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문학사상, 2018), 광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사진은 예술품이 되며, 그때 기술은 “지상에 빛을 보내준 태양”(「세 번의 만남」) 덕분이라는 인식으로 우주관이 성장한다. “먼지 속에 별이 있”(「방을 닦고 나서 별을 보다」)다는 인식에 이르기까지 이승하는 먼 길을 돌아온 셈이다. 의상의 『법성게(法性揭)』로부터, 살비듬 한 조각에도 인류의 유전정보가 저장되어 있다는 각성을 하게 된 것. 시인의 자리가 ‘작은 먼지 속의 우주’인 것처럼, 생명 있는 것에는 어떠한 위계도 있을 수가 없다. 크기와 위력을 동일시하지 않으므로 이승하 시에서 먼지와 우주의 알레고리는 더욱 풍성해진다. 햇빛 한 줄기에 무심코 떠 있는 먼지에 새겨진 정보에서 먼 조상을 읽고, 더 거슬러 가면 기원의 별이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우주라는 부호를 푸는 것”(옥타비오 파스)이다. 이승하는 가장 작은 사물에서 지금 우주 암호를 해석하고 있다. ‘먼지 시(詩)’. 이 명명법에 시인이 화들짝 놀라겠지만, 셈할 수 없는 우주적 충만을 시인이 먼지로 직관하고 있기에, 먼지처럼 흩날리더라도 거기에 자신의 정보가 들어 있으므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 이렇게 이승하의 시는 처음부터 천체 안에서 발아하여 진화했다. 우주는 실재를 재현할 수 없는 거리에 있으므로 언제나 추상 언어로 교체된다. 그러나 먼지는, 시인이 쓴 것처럼 걸레로 훔쳐낼 수 있는 사물이다. 아주 작은 먼지 현상으로 생명의 본질을 직관하는 시인의 살갗에 그 우주가 있다.

 

 

우주에는 감정이 산다 김영산·고광식·양해기·김두안의 시

 

2000년대 전후의 인지과학 이론은, 인간 뇌의 인식 작용과 정보 처리 기능에 혁명을 가져왔다. 고상하다 여겨온 지식과 천박하다 여겨온 감정·욕망이 인지과학의 지도에서는 회로가 교차한다. 인간은 지구 표면에 붙어살아오면서 중력 작용을 이성적으로 학습해 왔으나, 시인은 기호의 연금술사. 과학 방정식을 분해하고 녹여 시를 제조한다. 이때도 낭만과 서정은 살려놓으려 한다. 이것을 닫고선 직관이 나아갈 곳이 없어서이다. 때문에 ‘별’ 시는 딱딱한 보고문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시인은 정신을 기호로 표현하고, 그 정신을 아는 일조차 자신이 쓰는 기호로 수행한다. 우주를 ‘꽃’이나 ‘먼지’로 비유하면 이 세계는 ‘언어’가 된다. 갈 봄 여름 없이 피는 꽃을 호명한 소월의 시도, 꽃의 이름을 불러준 김춘수의 시도, 우주 하나를 언어로 열어놓았다는 점에서는 똑같이 우주시다. 상상의 범주가 우주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세상의 모든 시는 우주의 신경줄이나 다름없다.

지구인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주 공간은 지구 외부로 배격된다. 지구 중심 사고가 정작 지구를 우주에서 밀어내면서 이루어지는 것은 역설이다. 상대성의 우주 개념으로 보면 우주시는, 지구를 아우르는 거대 우주의 현상학도, 그리고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미시사도 우주적 사건으로 만나야 한다. 따라서 우주시는, 지구의 외부를 추상하는 절대적 위치와, 모든 행성의 상대성 안에서 미적 수행을 하는 경우를 망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시 또는 우주문학을 일관되게 미적으로 조형해 나가는 경우에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김영산은, 보다 많이 감추면서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화법에 능숙하다. 그의 시는, 우주 생태는 거대한 운동성이고, 우주문학은 전위적인 시운동이라는 사실을 선포한다. 『시마(詩魔)』(2009)에서 백비(白碑)는 모든 주검의 상징으로서, 신(神)도 학문도 시(詩)도 사망한 시대의 표상이다. 나아가 이 백비는 3차원의 시·공간을 넘어 우주의 운동 에너지를 메타 수행하는 매체다.

 

이 지구에 시도 역사도 종교도 빗돌을 많이 세웠다. 나무의 기억은 나이테이고 시인의 기억이 시라면 지구의 기억은 무엇인가. 산 자들의 몸에 새겨진 죽음의 기억이다. 새기는 것, 지우는 것이 팽팽히 맞서라! 서 있거나 눕고 싶은 우리는 모두 빗돌이다.
- 「시마 - 백비」,(『시마(詩魔)』, 천년의시작, 2009, 34쪽)

 

죽음과 기억, 그리고 애도의 차원을 넘어 김영산은 우주 상상력을 펼친다. 빗돌의 실재성에도 불구하고, 기호의 의미 작용을 닫아버린 이 물체를 놓고 시인은 생성과 소멸에 관한, 수다한 비유법을 구사해 나간다. 죽음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잠재적 가시성을 부여하면서 김영산의 시는 태어난다. 백비라는 텅 빈 매체로 문자의 의미 작용을 역설하는 기법이다. 이때 김영산은 시간 작용 안에서 시의 죽음을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연금술로서 언어의 죽음이다. 즉, 새로운 언어 제조 과정에서 열정을 피워 올리는 작업인 것이다. 2000년대 전후 우리 시단에 등장한 미래파가 동시성의 시간을 실험할 무렵, 김영산은 불변의 축인 신화의 시간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간인 변화의 축을 모순적으로 사유했다. 감각의 비총체적 작용을 밀고 나가면서 시간마저 파열한 것으로 본 미래파와 달리, 김영산의 시에서는 기원의 시간과 현실의 즉시성이 맞부딪친다. 지성주의가 시단을 주도할 무렵 김영산도 새로운 문법으로 우주를 기록했으며, 시대의 유행이나 특성에 자신의 시를 고정하지 않는다. 우주의 소리를 율려로 다성화하고, 그것을 시의 운율로 시각화할 때 공감각 이미지가 발생한다. 이렇게 태어난 시-산문의 혼합물이 ‘시마’다. 신생 언어의 탄생 과정을 우주 팽창의 원심력으로 기호화할 때, 그 의미는 끝없이 분산하고 확산한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생명체가 뱉어내는 폐색 짙은 목소리와 음악 운율이 교합하고, 모든 파괴는 생성의 에너지와 접합하며,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새로운 언어가 연금된다.

뒤이은 시집 『하얀 별』(2013)에서도, 전작에 이은 상징과 암시로 수행 언어의 밀도를 높인다. 자신의 시-산문을 ‘시설(詩說)’로 규정하면서, 이전 시집의 형식을 사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표제 ‘하얀 별’에서 보는 것처럼, 이것은 죽음 직전의 초고밀도 빛이며, 말 못함을 극대화한 것이자, 감당할 길 없는 다성성을 차라리 활활 태우는 언어의 제의다. 한 획의 기호도 없이 모든 말을 하는 백비는, 곧 폭발하면서 죽어 신생의 별을 낳는 초고밀도 별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하얀 별도, 백비도, 말 못함·말 없음으로 팽창한 우주 텍스트인 셈이다. 두 시집 모두 메타 실행을 하고 있는 만큼, 이것이 김영산의 시론으로 발전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전작의 낭만적 경향을 걷어내면서도, 죽음이 임박한 생명체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심어놓고서 그것을 대체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일찍이 박제천이 이렇게 물었다. “우주에도 감정이 있을까 저들도/사랑의 감정으로 별을 배고 별을 낳을까”(「없음의 지옥」 마지막 연, (『푸른 별의 열두 가지 지옥에서』, 청하, 1992). 우주의 중력을 감정 문제로 녹여낸 시는 또 있다.

 

죽음의 문이 열리면 시간은 빛이 되지 나는 이제 어둠이니까
우주여 안녕?
나는 다시 연둣빛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어
- 김두안, 「죽음에 대한 리허설」 마지막 연(『물론의 세계』, 문학수첩, 2019)

 

섬뜩한 죽음 이미지와 “연둣빛 감정”이 같은 지평에 있다. 죽음 리허설이라는 기획 안에서 시적 화자는 가상의 우주 공간을 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심연에서 빠져나올 때 의식계에서 먼저 깨어나는 것이 감정이다. 김두안의 시에는 상처와 죽음 이미지들이 낭자하지만, 몇 개의 차원과 시간을 관통하며 발견해낸 감정 영역은 각별히 소중하다. 환상 요소로 꾸려 내놓는 우주 공간과 행성들에서 감정의 갈래를 짚어 나가다 보면, 인류의 탄생을 물질로 고정해온 관념이 슬며시 밀려난다. 태어나던 순간의 그 모든 정황에 무지하므로 인류는 그때를 알아내려는 기술을 진보시켜 온 사피엔스가 아니던가.

인간의 우주관은 지구 중심으로 고정된 자리에서 진행되어 왔으나, 아인슈타인은 그런 자리는 없다고 보았다. 우주 공간 어디에서 바라보든 모든 장소는 정지해 있는 경우가 없어서 우주를 관측하기에 좋은 기준 좌표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대성이론이다. 제 궤도를 따라 어지러이 돌아가는 지구에 붙어사는 인간이 중력의 정체를 알게 된 계기는, 낙하한 사과가 지구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지구 표면에 안착했기 때문이다. 현대시에서 그 사과는 이렇게 기능이 개량된다.

 

나는 외계행성의 DNA를 코로 힘껏 흡입했다
벌거벗은 몸이 떠오르며 우주 전체가 따뜻해졌다
이곳에서 보면 지구는 사과를 떨어뜨리기에 너무 멀다
- 고광식, 「외계행성 사과밭」 부분(『외계행성 사과밭』, 파란, 2020)

 

고광식 시의 오이디푸스는 초지능인이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공간 이동을 거쳐 외계행성에 도달한다. 이렇게 발랄한 앙티오이디푸스의 정신 심리에 우울증의 기미는 없다. 외계의 유전정보를 마음껏 전유하는 그의 심리가 이전의 전통을 조롱하는 데로 모아진다. 혈통의 중력을 적용하지 않아도 될 외계로 간 그가 간신히 “끊어지지 않고 늘어진 사과껍질”을 신뢰하는 행위는, 이전에 화자를 규정했던 견고한 틀에 대한 야유다. 행성 간 중력 작용을 믿으며 “천체망원경을 들고 수시로 나를 관찰”하는 가족과 달리, ‘껍질’을 벗어놓고 “벌거벗은 몸”이 되어 혈통의 중력과 가족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누린다. 벌거벗은 몸에 있는 진짜 유전 정보와, 껍질뿐인 아버지의 유전자를 분리해 놓고 전통 극복을 꾀한다. 시적 화자가 가꾸는 외계의 사과밭은, 지구의 그것과 달리 화자를 모든 중력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는 상징적 “분화구”다.

오래 매달려 왔으나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신화의 세계로 돌려 정신의 위안과 해방을 누리기도 했던 인류가 이제는, 그 문제를 기계에 프로그래밍해 놓고 세계의 비밀들을 줄줄이 뽑아낸다. 어느 날 등장할 인간신이 자신의 기원과 종말의 시간을 동시에 알게 된다면, 비밀이어서 아름다웠던 것들은 그 가치가 모두 폐기될 것이다. 인류는 영원히 현재성의 지속으로 정의되면서, 죽음의 공포에 아예 무지해질 것이다. 양해기는 『테라포밍』(세상의모든시집, 2018)에서 별을 공간화하여, 실재임 직한 SF를 시뮬레이션한다. 연속성이 깨진 현대의 시·공간을 압축하고, 인간의 정신을 주입한 기계 구성물의 미래를 가상 체험하는 방식이다. 별에서 시작한 인류 진화의 “최종 종착점은 인공지능”(「가상현실」)이며, “생명체의 진화 그 마지막 단계”(「보이저 X」)에도 인공지능이 있다는 상상 속에서, “혼합 생체”가 인류의 언어 사전을 바꿔 놓는 사태가 벌어진다.

 

노총각과 노처녀
별거와 미망인 과부와 홀아비
이혼과 재혼 돌싱과 혼밥
우울증과 고독사 독거노인과 변사체 같은 단어들은
사전 속에서도 영영 사라지게 된다
- 「휴머노이드」 부분

 

위 시의 현실이 진화의 마지막 단계라면, 인간의 사랑도 생명도 완벽해진다. 따라서 자기성찰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 지켜야 할 약속과 윤리로부터 해방될 것이고, 영원히 자유로우면서도 외로움은 모를 것이다. 필요한 감정의 수치를 계량하여 결핍 부분만 주입하면 되므로, 그것이 넘쳐서 괴로울 일도 사라진다. 타자를 위한 시간을 가질 이유가 없어진 그에게 어떤 잉여감정이 있을 것인가? 분노할 일도, 울 일도, 가슴 아파할 일도 없는 그에게는 인류의 종말을 관계의 유한성으로 바꿔 생각할 여지조차 없다. 그런데 그가 더 이상 진화할 수 없다면 그를 생명체라고 할 수 있을까? 양해기는 여기서 휴머노이드의 정체성에 주목하고 있다. 열정과 자유의지를 조절해주는 테크놀로지 게이지가 차갑게 작동하는 상황을, 인간 의식의 진화가 아닌 기계의 그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진화란 생명이 있는 존재에 적용되는 말”이라고 쓴다. 진화의 진전은 곧 의식의 진전이며, 의식이란 생명이 쉼 없이 약동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인간의 몫인 의식과 감정을 물질로 대체하여, 두뇌 회로에 있는 의식조차 사물화한다. 인공지능에 의식을 결합한 사피엔스, 그리고 화성의 지능인은, 양해기의 시에서처럼 두 공간을 주기적으로 테라포밍하면서 기계적으로 거듭 부활할 것인가? 시인이 내린 답은, SF 영화에서의 실패 장면처럼 명쾌하다. 인류에게 “축적된 DNA정보를 덧입힐 수 없”는 기술의 한계, “누군가는 우주 수송선에 직접 올라야만”(「테라포밍」) 하는 극단적 위험 때문에라도, 사피엔스의 진화와 기계 진화의 능력은 같은 본성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다.

양해기가 이렇게 SF 기호들을 제시하면서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이 무얼까. 포스트휴머니즘 감수성이 아닐까 한다. 인류에게 이질적인 생명체들이야말로 우주 생태의 최전선에 있다는 것. 그 존재자들을 포용하면서 인류의 가치를 알아 나가려면, 지구 바깥으로 시선을 이동하여, 우리도 우주인이라는 감수성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 생명체와 기계를 결합한 1960년대의 사이보그가 위험한 우주 환경에서 일하도록 설계된 우주 노예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인간의 욕망과 관련하여 평론가 김현이 무서운 말을 했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욕망은 무서운 욕망이고, 물불을 안 가린다는 것. 기원을 알려고 하고,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에서 점화한 인류의 우주 탐구 열의 때문에 생명은 물질화되었고, 문명도 진보해 왔다. SF 상상력과 과학적 호기심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하늘을 올려다볼 이유가 사라져가고 있는 시대, 대관령 산정을 찾아 별바라기를 해야 하는 시대의 시는 과연, 이후 어떻게 약동할 것인가?

 

 

 

 

 

김효숙 | 문학평론가,  2017년 『서울신문』 문학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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