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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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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이순애-구름의 어깨에 기대어 구름의 어깨에 기대어 해 저물녘 강가입니다 서성이며 물소리 바람 소리 듣다가 문득 구름 소리 듣고 싶었어요 올려다 본 하늘 손짓하는 구름의 기다림에 너덜한 심장 한 켠 떼어 구름의 어깨에 기댄 채 속삭임을 들어요 내 마음속 들여다보며 서러워하는 구름 호통을 쳐 천지가 진동하기도 했죠 그대는 듣고 있나요 이 엄중한 가르침 진노한 구름의 언어를요 부서진 심장의 조각들이 무거워 가슴에 부둥켜안고 밤새 흘리는 눈물 당신의 창은 비닐 껍질처럼 얇아졌어도 내 영혼에 손이 없어 깨뜨리지 못합니다 오직 여자라는 이름으로 짓밟혀 내가 흘린 피로 당신의 마후라는 빨갛게 물들었죠 자랑스럽게 하늘에 날릴 수 있나요 구름의 어깨에 기대어 흘린 눈물로 안개꽃을 피우고 있어요 당신의 마음을 밝은 태양에 털어 말린 후 꽃다발을 드릴..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박희수-K시로 오라 거기서 너는 나의 흔적을 발견하리라 K시로 오라 거기서 너는 나의 흔적을 발견하리라 거기에는 ⇧와 ⇩가 있다 ⇧는 ⇩의 흔적을 바닥에서 훑고 ⇩는 하늘을 우러러본다 우리를 죽여가면서 죽어가는 그 하늘마저도 - ⇧가 남긴 흔적일지도 모르지, ⇩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이 도시는 모래와 사막으로 만들어져 있고 외벽에는 생기 없는 빛이 흐른다 죽은 사람들이 마른 장미처럼 서 있는 십자가가 달린 돔형 건물 아래로 철조망과 철로가 휘어지고 거기에 어린 ⇧가 해맑은 얼굴로 돋보기를 들고 걸어가며 - 이게 ⇩일까? - ⇩란 이런 생물일까? - 이 발자국과 흔적은 ⇩의 생태일까? 회색빛 하늘은 조리개처럼 조여들고 하늘의 모든 것이 복잡한 장미의 가운데로 모인다 부평으로 오라 거기에 내가 살았으며 박해받았으며 죽어서 흰 뼈가 되어 눈부신 물고기로 살아 있음을..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박소란-따뜻한 이불을 덮고 주무세요 따뜻한 이불을 덮고 주무세요 누군가 앉았다 일어난 자리 머플러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지나치게 움츠러든 사람 누군가 그를 두고 가버린 것이었다 어서 오세요 사소한 인사라도 듣고 싶은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아 커피숍 닫힌 문을 비집고 들어온 지난 계절의 잎새 어떤 말이라도 필요한 것이었다 내일 전국 흐리고 쌀쌀 밤부터 기온 뚝, 일기예보 문자마저 한참을 들여다보는 언제부턴가 눈 닿는 곳마다 비가 듣는 것이었다 그 비를 다 맞는 것이었다 저 테이블 저 의자 저 쓰레기통 찌그러진 찌그러진 여기에 버려주세요 잇자국이 선명한 컵이나 식어버린 커피의 안부를 염려하는 그냥 그런 감사합니다 작은 우연이라도 필요한 것이었다 살아 있다는 사실, 가끔은 그 사실을 들키고 싶어 바닥에 맥없이 ..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한세정-버진 로드 버진 로드 부케를 쥔 손이 떨린다. 웨딩 마치에 따라 보폭을 맞추고 눈인사를 하고 하나를 맹세한다. 폭죽이 터지고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인다. 박수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고개를 기울여 달아오른 입술을 내민다. 뱀의 혀끝처럼 갈라진 길들이 꿈틀거린다. 온몸이 흡반이 되어 서로를 끌어당긴다. 한 몸으로 문드러지는 끈끈한 과육이 된다. 썩어가는 과육에서 풍기는 달큰한 향내. 잘게 잘린 색종이가 먼지처럼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샹들리에 장식이 물방울처럼 번져나간다. 박수 소리에 갇힌 채 당신과 나는 납작한 액자가 된다 한세정 | 2008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입술의 문자』.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이종섶-감정손해보험 감정손해보험 노후에 맞닥뜨리게 될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 노후가 아니더라도 어느 날 사고처럼 다가올 쓸쓸함을 견디기 위해서 감정손해보험회사와 계약을 맺고 한 달에 한 번씩, 또는 그 이상의 기회를 만들어 보험료를 지불한다 성실한 납부자, 그러나 가난한 납부자 돈이 많다면 감정보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진 게 없으니 실비 보상정도의 감정보험이라도 들어놔야 안심이 된다 혼자라는 것, 친구가 없다는 것 이대로 흘러가면 어느 순간 감정의 대형 사고에 직면하게 될지 몰라, 그 내상의 두려움을 아는 자로서 이대로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오늘의 외로움과 내일의 쓸쓸함이 그때마다 보험료를 인출할 것이다 감정보험에 일찍 가입해서 다행이다 오늘의 감정을 견디기가 쉬워졌다 이종섶 | 2008년 대전일보..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박경옥-달팽이를 읽다 달팽이를 읽다 가랑비 하루 종일 작은 초록 위로 흘러들고 발등을 적시는 저녁의 흙냄새가 소쿠리에 담기는 텃밭 가는 길은 파랗고요 개구리밥 논물에 그렁거려요 질척한 밭둑으로 비닐우산 속 하늘은 맨발로 첨벙이고 청개구리 한 마리 폴딱 아욱밭으로 뛰어 들어요 거기, 잎사귀 뒤에 숨어 있던 달팽이 놀란 가슴 천천히 더듬이로 어루만져요 가만가만, 저 천천히는 무얼까요 청개구리처럼 뛸 수도 없고 밤마다 찾아오는 그리움의 무게를 목청껏 뿜어낼 수 없는 슬픔의 기호일까요 빠르고 단단하고 높은 것들이 행과 행을 이루는 편견의 문장엔 쉼표도 없고 느낌표도 안보여요 얼마나 안간힘을 썼으면 연을 바꾸는 행간이 침묵으로 사뭇 축축할까요 행여 눈물도 상처도 더듬이로 달래는 저 둥근 고요가 몸이 몸을 껴안고 생을 끌고 가는 거라면..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양숙영-흔적 흔적 호탕하게 웃음이 헤프던 날도 하늘이 내려앉듯 절망이 밀려온 날도 망설임이 크던 마음 모두 다 털어버린 용기를 앞세워 굽은 숲길 따라 오르고 오르며 어느 양지녁 만날 때까지 오르기만 하자는 발걸음 어느 것 하나도 소용없다는 마음 하나 꽉 잡아매고 얼마쯤 따라 오르는 낯선 길 안개 피어 잘 보이지 않는 일주문 앞에 멈추어 버린 마음은 어디에 있는지 온데간데없고 그림자이듯 육신 떠난 옷자락만 그 흔적을 더듬어 찾고 있을 뿐 고요하다 양숙영 | 2007년 계간 『문파』 등단. 시집 『는개』. 제4회 배기정문학상 수상. 한국문협위원.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문파문협 이사. 고양문협 이사.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최정우-아침 바다 아침바다 안개에 포말이 부딪힌다 손가락 사이로 떨리던 넋이 바다로 떨어진다 배가 바다를 저어 걸어갈 때마다 어린 눈에 들려진 눈물 같은 바람이 바닷속을 헤엄쳐 간다 먹이가 되어 바다로 돌아간 이름 떨어지는 눈빛 속에 물고기 떼 멀어져 가고 가슴이 파도에 부서진다 아침이 보이는 바다에 두고 온 흔적처럼, 기억에 바다가 부딪힌다 최정우 | 2005년 『한국문인』 등단. 문파문인협회 사무국장. 문협80년사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