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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2020년 여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기획특집] 윤의섭 - 지저귀는 새의 나이

 

지저귀는 새의 나이

 

 

1. 신인-새

 

시를 쓸 때도 그렇지만 주어진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하는 강박으로 인해 이번 기획특집 주제인 ‘현대시 속에 날아든 새’라는 포괄적인 틀에서조차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나름의 궁리를 통해 나는 ‘날아든 새’를 현대시의 영역 밖에 있는 존재로부터 끌어오지 않고 ‘시인’이라는 문학적 영역에 속한 존재로부터 소환하기로 했다. 이렇게 정하고 나니 우선 2020년대에 들어서서 새롭게 등장한 신인 시인(이하 신인으로 호칭) 몇몇이 어쩌면 ‘현대시 속에 날아든 새’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물론 이 신인-새의 부리엔 시가 물려 있다.

거론할 신인을 떠올려 보다가 실제 ‘새’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가끔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번도 떠올려보지 못한 의문이다. 대략 알아보니 대부분 새들의 나이는 20년 이내이고 20년 이상 사는 새도 꽤 있었다.(백조의 나이는 70년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 선입견이지만 새는 언제나 젊고 생생한 존재로 여겨져 왔다는 것이다. 실체를 본 적은 드물고 새소리만 듣다보니, 또 듣는 시간이 주로 새벽이나 아침이다 보니 그게 겹쳐져서 그런가 내게 새는 항상 젊고 청초한 존재이다. 새가 어리든 나이를 많이 먹었든 싱그러운 목소리를 들려주는 새는 언제나 청춘이다.

신인은 새의 그런 젊고도 청초한 감각을 가져다준다.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현대시가 일부 고인 물 현상에 처해있다고 보면 올해 날아든 젊은 새로서의 신인은 그 고인 물길을 터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기대로 먼저 살펴볼 신인은 이기현 시인이다.

 

우리 놀이터 가서 놀자 손잡고 두꺼비집을 짓자 누가 손 빼면 무너지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자 그러나 우리 적요를 발설하진 말자 시끄럽게 떠들어대도 우리는 침묵에 대해 잘 아니까 노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빛을 모조리 소모하자 서로 구겨진 얼굴 사이사이에 낀 모래를 훔쳐 주자 샌드 아트처럼 훔친 모래만큼 표정이 생겨나도

슬프니? 묻진 말자 슬픔을 더 이상 기억으로 만들지 말자 우리 뭍으로 나와 햇볕을 쬐고 있는 향유고래의 등 위에서 놀고 있다고 생각하자 석고를 뜨는 기분으로 우리 절대 손 놓지 말자 우리 약속들이 기항지에 정박한 선박들처럼 목적지가 모두 다르더라도

혼자 흔들리고 있는 그네의 등을 조용히 밀어 주자 얼굴부터 입수하기 시작하는 고래만큼 부서지자 우리 잉여의 빛이 머무는 해변이 되어 온종일 섞여 있자 우리 그러고 있자

- 이기현, 「슬픈 토우는 고래만큼」 전문(『현대시학』, 2019.11/12월호)

 

시에서 보이는 지속적인 청유는 화자 스스로에게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 다짐은 슬픔 속에서도 담담하게 미래를 함께 하자는 의지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시에 진술된 모든 상황과 현실은 상상이다. 상상은 상징과 환유로 구체화되어 이미지를 형성한다. 나는 이 시가 신선하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이 시는 매우 많이 퇴고를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시의 문장마다 튀어나온 모서리가 없이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 시가 창작된 시기가 꽤 오래 되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신인의 시에 일반적으로 바라는 신선함과 발랄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기현 시인은 신인으로서 이 시를 물고 날아든 새이다. 2020년 현대시의 한 복판에 이 시를 놓고 날아가 다른 시의 잎새를 부리로 다듬고 있을 새로서 이기현 시인은 젊은 신인이다. 실제 시인의 나이가 젊든 나이 들었든 신인은 모두 젊다는 점을 새삼 상기해 보면 이제 이 신인의 시가 앞으로 얼마나 오래 젊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궁금해진다.

위 시의 발화 방향이 바깥과 미래 시간을 향해 있다면 다음에 볼 시는 그 방향이 시인의 안쪽과 정지된 시간으로 향해 있다. 조윤재 시인의 시가 그것이다.

 

이 폐건물에는 정지된 심장을 움켜쥐는 사람들이 살아간다. 말라붙어가는 심장을 통해 첫눈이 내린다는 걸 알 수 있다. 꿈틀거리는 체온은 유머가 없고, 단절은 쉽다. 공급이 끊긴 전력, 암전 속에서
피로감에 깜빡이는 눈
개인적이라서 중의적으로 변해가는 살갗.
약간만 만져져도 녹아내릴 것 같아서

계단이 접힌다.

층계참에 다다르면 여기가 전부라는 소리가 퍼진다
어렴풋이 올라갈 길이 보이는 듯하지만
심장은 도망가고
정지된 사람만이 층계참을 지킨다.

출구가 애매한 곳에 천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도약한 곳에도 도약하지 않은 곳에도 바닥은 없었기 때문이다. 디딜 수 없는 방들, 여긴 4층이되 4층이 아니다. F층이라고 대체해도 F층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태롭게 살덩어리를 굴리며 방들의 개수를 세어보면, 세어볼수록 하나씩 줄어간다. 손가락과 함께, 발가락과 함께, 눈알과 함께, 체모와 함께. 부속품들은 사라지는 것을 명령 받은 듯이, 어지럽게, 이름조차도 타의적인 채.

그렇게 폐건물이 된 것이다.

이곳의 옥상은 열리지 않는다
심장이 상한 이유이기도 했다.

- 조윤재, 「무능력」 전문(『시인동네』, 2020.3월호)

 

“바닥”도 없고 “옥상”도 열리지 않는 “층계참”에 “폐건물”이 있다. 시를 읽다보면 “폐건물”이 단박에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폐건물이 된 것이다”라는 설명을 굳이 대면서 조윤재 시인은 어떤 층위로도 대체할 수 없이 점차 사라져 가는 우리의 비극적인 실존에 대해 말해 준다. 이 시는 우리라는 현대인이 처해 있는 상황을 물질화하여 보여준 알레고리이다, 따라서 이 시 역시 상징과 환유로 조직된 상상의 시공간을 다루고 있다.

시에서 발화의 방향은 “사람들”로 지칭된 우리 신체의 내부로 향한다. 동시에 그 방향성은 도무지 바깥으로 향하지 않고 마치 정지된 듯한 시공간 안으로만 파고드는 폐쇄성을 갖는다. 제목 “무능력”이 의미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 더 부각되는 지점이다. 얼핏 보면 제목 “무능력”이 ‘무중력’으로도 읽힐 정도로 어디로든 천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우리 삶의 무참함을 드러낸다.

앞으로도 출구 없는 비극성을 향해 더 나아갈 것 같은 이 신인 역시 현대시의 고인 웅덩이에 시를 떨어뜨려 파문을 일으키는 참신한 새이다. 싱그러운 새이다.

모든 시인은 한 때 신인이었다. 그런데 아주 일부는 실제 나이를 먹어서 그렇든 시력이 쇠잔해져서 그렇든 점점 늙어가는 시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의 시는 더 이상 즐겁게 읽히지 않는다.

신인 이후 시는 긴 세월 동안 쓰일 것이다. 그 사이에 세상을 대하는 관점과 관심사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시의 신선함이나 예각은 새로운 측면에서 시도될지언정 사라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새가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새소리가 늘 청초하고 싱그러워 젊다고만 생각되는 것처럼 시인은 늙어가도 시는 젊음을 유지해야 한다. 물론 나이 든 자의 중후함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숙성된 깊이를 갖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그 원숙함은 필요한 것이나 원숙이 시의 풀어짐이나 시적 문장으로 위장한 직설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시는 나이 들수록 더 새롭고 더 젊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먹는다고 표현하는 생리적 나이가 많아질수록 젊은 시를 쓰기 위한 의지와 관록에 대해 되씹으며 고민하는 시간도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2. 시인-새

 

화사한 마음들은 어디론지 떠난다

화사하지 않아도 어디론지 떠난다

길이 안개 속으로 휘고 상처 입은 사람들 마음이 철길에 물든다
떠나는 날의 슬픔보다 돌아오는 날의 통곡이 낡은 역사를 흐려놓을 걸 알아
아주 먼 여행 중인 영혼들은 육신의 여행을 꿈꾼다

세상의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시작되는 여행은
몸에서 몸으로 가는 여정이었고

몸은 지옥이었던 생의 의미를 놓고 숙려를 연장하지 않는다
사흘 숙려기간은 지났다 숙려 장소는 냉동실이었다

십 년 째 숙려 중인 젊은이는 사흘의 숙려가 부럽다

사흘, 꽃이 피고 철새가 돌아오고 아이가 태어나고
노동자가 벨트에 끼어 죽고 고공시위가 계속되고 사막은
어느 곳에서나, 가령 냉동실에서도 시작된다

함께 가기로 한 고비였다

사막을 붉게 물들이는 낙조, 초원을 달려나가는 여인, 양의 뜨거운 피를 마시는 집시들, 낙타의 머리뼈를 타고 넘는 사막뱀은 파탄의 징후였거나 사후의 세계였거나

그것들을 그려넣을 목관의 공간은 비어 있다

아무도 떠나지 않는 역에서는 바람도 떠나지 않는다

- 김윤배, 「아무도 떠나지 않는 역에서는」 전문(『현대시학』, 2020.3/4월호)

 

1986년에 신인이었던 김윤배 시인의 위 시가 이제 갓 등단한 오늘날의 신인이 보여주는 시의 ‘젊음’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이 젊은 신인이 보여주기 힘든 ‘연륜’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시는 두 사람이 죽었고, 한 사람은 사흘 장을 치르고 먼저 떠나고 한 사람은 십 년 째 냉동보관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시는 현생에서 후생으로 떠나는 사후의 여행과 그런 여행을 떠나지 못한 자의 허망한 세상을 대비해 보여주면서 “사막”으로 비유된 삶의 종착역, 혹은 출발역에서 맞이하는 “숙려‘의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숙려기간“이 그것이 사후일지라도 어쩌면 먼 여행을 떠나기 위해 주어진 우리 삶의 기억하지 못할 또 다른 시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자의 서‘처럼 펼쳐진 사후 세계의 풍경까지 산 자의 세계가 연장되어 있다고 읽히기 때문이다. 죽음은 무화되고 ”숙려기간“ 전의 시간과 ”숙려기간“ 후의 시간이 이어져 있다는 사유를 토대로 한 이 시는 바깥으로만 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면으로도 향하지 않으며 아직은 다른 세계로 떠나지 못한 자의 현실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점은 앞에서 거론한 두 편의 시와 다른 방향성인 것이다.

위 시는 쉽게 관심을 둘만한 영역을 다루지 않으며 무게감이 있다. 그런데 시의 전개 방식과 어조는 노련하면 노련했지 긴장이 느슨해졌거나 상투적인 호소로 이어지지 않는다. 김윤배 시인-새는 쇠잔하여 진부해진 직설을 나열하지 않고 있다.

나조차 바라마지 않는 ‘신인의 감각을 유지하기’라는 힘겨운 투쟁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길이 결국 한 때 신인-새였던 우리가 가야하는 항로이다. 우리가 지저귀는 시는 독자에게 언제나 젊어야 한다.

 

 

 

 

 

윤의섭 | 1994년 『문학과 사회』 등단.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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