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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2020년 여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기획특집] 이병국 - 시라는 장소에 관한 짧은 시론

 

시라는 장소에 관한 짧은 시론

 

 

1.

김수영에 의해 재주도 없고 시인으로서의 소양도 없으며 경박하고 값싼 유행의 숭배자라 평가 절하된 박인환으로부터 시작해야겠다. 박인환은 1926년 강원도 인제군에서 태어나 해방이 된 해에 종로 3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를 경영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시 「거리」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56년 31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전후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하였으나 대체적으로 경박함과 겉멋 든 시들로 센티멘털리즘에 경도된 시인이라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해방직후에 발표한 시들은 대부분 현실 참여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후에 발표된 그의 시를 한국전쟁 경험으로 인한 결과로 도피적 낭만성으로 침잠했다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그가 전쟁 직전인 1950년 5월 16일 <경향신문>에 발표한 시 「1950년의 만가(輓歌)」는 그의 도피적 경향의 시들이 한국전쟁 경험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불안한 언덕 위에로/ 나는 바람에 날려간다/ 헤아릴 수 없는 참혹한 기억 속으로/ 나는 죽어간다/ 아 행복에서 차단된/ 지폐처럼 더럽힌 여름의 호반/ 석양처럼 타올랐던 나의 욕망과/ 예절 있는 숙녀들은 어데로 갔나/ 불안한 언덕에서/ 나는 음영처럼 쓰러져간다/ 무거운 고뇌에서 단순으로/ 나는 죽어간다/ 지금은 망각의 시간/ 서로 위기의 인식과 우애를 나누었던/ 아름다운 연대를 회상하면서/ 나는 하나의 모멸의 개념처럼 죽어간다
- 「1950년의 만가(輓歌)」

 

이 시는 한국전쟁과는 무관한, 오히려 해방공간에서 느꼈던 박인환의 현실인식을 감각하게 한다.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와 「남풍」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주창하며 새로운 국가 건설의 가능성을 희망하던 그에게 해방공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은 “행복에서 차단된/ 지폐처럼 더러운 여름의 호반”의 오염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적 요구는 1949년의 반민특위 해산과 남로당 프락치 사건, 김구 피살 등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 가능성을 상실하였으며 박인환을 비롯한 당시의 사람들에게 절망과 불안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희망과 절망의 분열된 주체는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의 모멸의 개념처럼 죽어”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2.

해방공간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상태로 주어진 것이었다. 물론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준비해오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 준비가 미처 완결되지 못한 상태로 던져졌기에 그 안에서 주체는 주어진 공간을 의미화된 장소로 변화시키는 데 한계를 보였다. 에드워드 렐프의 장소론에 기초하여 말하자면, 해방된 조국은 그저 주어진 것으로써 추상적이며 개념적인 공간로 존재했다. 그것은 생활 세계가 직접 경험되는 의미의 중심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원천이자 구성원들의 정서적 유대를 경험하게 하는 인간 실존의 중심인 장소가 되지 못했다.

주어진 질서로 작동하는 공간이 아닌 주체를 주체이도록 하고 존재를 존재로 만드는 자기 정체성 확립의 행위가 가능한 장소를 만들려는 과정이 한국 현대사의 흐름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그 역사적 변화의 양상 속에서 문학은 일정 부분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주어진 공간을 주체의 의미화된 장소로 만들기 위해 타자들과 만나 상호주관적이고 보편적 맥락을 확보하여 공동체의 구성으로써 정체성을 지닌 주체를 구축하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해 나간 것이다. 그 목록은 김수영이나 신동엽, 신경림, 황지우 등의 시인에서부터 황병승, 김민정, 진은영, 심보선을 거쳐 강성은, 안희연, 이소호로 이어져 있다.

공간을 장소로 전유하기 위한 이들의 시적 행위는 주어진 공간의 불가해성을 심상지리의 영역으로 옮겨놓는 수행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는 사건이 되도록 이끈다. 다시 말해 사회적 사건들을 고발하고 소외된 존재의 목소리를 대리하며 일상에 퍼져 있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구조를 폭로함으로써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공간을 의미화된 구체적 장소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우리가 획득하였다고 생각했던 그 장소가 주체로 의미화된 장소가 아닌 위계와 폭력으로 구성된 곳임을,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해야만 하는 상상된 곳임을 폭로하고 있는 셈이다.

이 ‘불안한 언덕’을 어떠한 방식으로 전유하여야만 언덕은 공간이 아닌 장소로 그 마음의 구조를 달리 할 수 있을까. 지금 이곳의 시는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한 쟁투의 한가운데에 놓인다. 그 방식은 타자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며 그 곁에 나란히 서는 방식(안희연의 경우)일 수도 있고, 자신이 경험한 젠더 위계의 폭력을 고발하는 자기 서사의 방식(이소호의 경우)일 수도 있다. 이러한 방식들은 일상적 공간이 개별화된 주체에게 의미화된 장소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재검토할 것을 요청한다. 이전의 시인들이 보여준 낭만화된 서정의 양식으로 발화되어 왔던 시를 상대화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박인환의 현실인식이 불안의 양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나 자기혐오를 바탕으로 시대적 문제를 극복해 나가려는 김수영식의 몸으로 쓰는 문학의 양상이 독점해 온 공간이 지금 이곳의 주체에게는 장소가 될 수 없음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부조리한 곤혹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행위에 현대시의 자리가 있다. 요컨대, 지금 이곳의 시는 주어진 공간이 은폐하는 억압적 관계를 재현하는 장소의 한계를 체감하면서 이를 돌파해 나갈 사회적 대화의 장으로써 새로운 장소를 확보하고자 하는 과정에 놓여 있는 셈이다.

어떤 면에서 기존의 저항 담론을 재현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일 수도 있다. 여전히 세계는 굳건하기 때문에 저항의 목소리를 일탈로 규정하며 이를 제도 안으로 끌고 들어와 또 하나의 다른 목소리로 간주하고는 스스로를 다양성의 담지자로 규정할 지도 모른다. 그런 연후에 새로운 공간을 주고는 그곳에서 상상적 공동체를 바탕으로 한 연대를 꿈꾸게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개인적 경험과 기억이 매개하는 보편성의 추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시의 발화가 시도되는 한, 세계의 강제는 끊임없이 부정되며 미끄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 쓰여지는 시는 부정과 전복의 가능성 속에서 사적이면서 공적인, 개인적이면서 보편적인 접합의 양태로 낯선 장소를 재구축하려는 시도를 수행해 나가야만 한다.

 

3.

그것은 민감하게 현실을 인식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시라는 매개로 발화되기 이전부터 세계 자체를 흔드는 행위가 수행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익숙한 방식으로 안전하게 주어진 공간에 머물며 이를 나에게 의미 있는 장소라 추억하며 안주하는 것에서부터 탈주해야 한다. 그런데 또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삶의 지평이 그 안전함에 의해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 딱 감고 고개 돌리면 세계는 안전하게 나를 포용해 준다. 따뜻한 가상을 향유하는 것만으로 삶은 윤택해질 수 있다. 그 상상적 욕망이 얼마나 위태로운 기반 위에 놓여 있는지 일일이 물어야 하는 작업은 곤궁하며 피로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는 무지와 편협의 외피를 단단하게 둘러 싸매고 세계의 변화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켜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반성적 존재로서 우리는 고착된 장소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장소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문학적 자장 안에서 끊임없이 전유되어 형상화될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누구나 쉽게 세계의 요구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문학적 사유로 아로새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 이곳의 ‘나’가 경험한 바의 부조리함을 경유하여 도착한 언어와 그에 대한 숙고 및 사회적 대화의 장을 향한 열린 태도 등의 적극적 행위가 따라야 한다. 불가해한 공간의 지리적 고착을 뛰어넘을 장소의 심상지리적 상상 또한 요구된다. 이때 우리의 시 속에는 주체와 타자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질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저 상호주관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층위를 상상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역사적으로 이어졌던 실패와 좌절의 기억이 도피적 낭만성으로 우리를 이끌지도 모른다.

문학적 장소성이란 그 장소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들의 기억과 그 기억으로부터 출발하는 정체성의 변화를 담아내야 한다. 그 수행성으로 말미암아 고착된 공간이 부조리하게 재생산하는 인정과 규칙의 규정에 균열을 내고 이를 상호주관적 소통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장소로 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 모든 것은 결국 삶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처하기 이전에 이미 현실을 인식하고 그 좌절의 기록을 써 나감으로써 가져보지도 않은 장소를 상실한 박인환의 경우처럼 현실적 감각에 기반을 둔 삶의 양태를 직시해야만 한다. 지금 이곳에 형상화된 시들은 상호 교차된 정체성에서 비롯된 관계의 양상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한편 그로부터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지시하고 있다.

결국 이 글에서 새로이 구축해야 한다고 말한 장소 역시 물리적 성격과 고정된 사고에 바탕을 둔 곳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현대시가 닿아 있는 지금의 장소는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 개념적으로 구성된 공간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한국 사회가 구축한 공동체적 장소 역시 위계적 갈등의 공간으로 일방적 폭력이 행사되는 상상적 장소였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장소 만들기를 위한 문학적 수행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는 보다 유연하고 가변적인 장소를 상상하는 것이 나은 일일 수도 있겠다. 이를 마르크 오제식으로 비장소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개방적이고 소통이 가능한 장소조차 온전히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에게는 한국 사회라는 공간을 장소로 재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 과정을 공유하며 ‘참혹한 기억’에서 죽어가는 존재의 곁을 위무하며 나란히 혹은 조금 더 앞질러 방향을 짚어주는 자리가 시의 장소인지도 모르겠다.

 

 

 

 

 

 

이병국 |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평론 당선.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제4회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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