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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2020년 여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기획특집] 이근화 - 경계에 선 존재들, 그리고 시의 날개

 

경계에 선 존재들, 그리고 시의 날개

 

마스크를 쓴 봄이 왔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밖을 내다본다. 어느 아침 아이들은 창밖을 보며 와, 나비다. 나비가 날아다녀요, 그런다. 10층 높이에 나비가? 설마. 흩날리는 벚꽃 잎이다. 그런데 정말 나비처럼 보인다. 제법 환상적이다. 얘야, 그건 꽃잎이란다. 아니야, 나비야. 정말 나비. 이 삶이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뿌옇게 흐린 봄의 대기로 폴폴 날아다니는 저건 아이에게 나비로 기억될 것인데, 더 이상 꽃잎이라고 바로 잡지 않았다. 마스크를 쓴 봄조차 실감이 나지 않는 판에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바로잡을 것인가 말이다.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이며 페미니스트인 도나 해러웨이는 인간중심주의 구도를 넘어서기 위해 유인원, 사이보그, 앙코마우스와 같은 혼종적 존재들을 제시한다. 인간/동물, 원시/문명, 인간/기계라는 이분법을 희석시키는 존재들의 구상은 애초에 ‘믹소트리카 파라독사’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흰 개미의 장 속에 서식하는 믹소트리카 파라독사는 다섯 종류의 박테리아가 공생하는 생물체로 흰개미가 먹은 나무 조각을 소화시켜 흰 개미에게 영양분을 제공하며 살아간다. 독립적인 개체로는 존재하지 못하는 이 생물체로부터 도나 해러웨이는 세계와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방식을 모색하고 상호 의존적이며 공존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즉 개체와 집합의 개념을 흩뜨리는 믹소트리카 파라독사를 통해 구체와 추상, 자연과 문화, 유기체와 기계, 남성과 여성 등 기존의 이분법과 이항대립의 미로를 통과해 그 경계를 붕괴시키는 사유를 전개해 나간다.

이후 그녀는 페미니스트 생태학자인 이블린 허친스의 영향을 받아 과학 분야에서 여성이 배제되고 있음을 자각한다. 객관적 지식은 백인 유럽 남성 중심의 전유물이라 비판하고 ‘상황적 지식’이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인식의 객관성은 자기 지식의 부분성을 성찰적으로 비판하는 데서 연원한다고 주장한다. ‘겸손한 목격자’로서 상황적 지식의 구성은 기존의 남성 중심의 학문 체계에 대한 저항을 내포한다. 그녀는 젠더 개념 역시 의미화 경험의 역사, 실천, 겹침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나 해러웨이는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1991)로 널리 알려졌는데 여기서 그녀는 ‘사이보그 페미니즘’을 주창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인간중심주의를 먼저 무너뜨리고 이 붕괴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녀는 사이보그를 페미니즘의 중요한 성찰로 가져갈 때 가부장제가 뿌리박은 불평등을 무너뜨릴 수 있고, 이질적인 것들의 연결과 접합이라는 자산을 페미니즘이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¹ 나는 생명체의 존재 양상을 연구하는 과학자도 아니고 인간의 역사와 윤리를 성찰하는 철학자도 아니고,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계층적 불평등이 심화된 이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꿈꾸는 급진적 혁명가도 아니다. 다만 글쓰기가 경계를 넘어서고, 구멍을 만들고, 틈을 벌이는데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인데 도나 해러웨이의 사유와 활동은 깊은 울림을 주었고 되새겨 볼만한 가치가 있었다. 허무맹랑하고 사기성이 짙은 정치 언어와는 결이 달랐다.

인간 활동이 화석 연료와 화학 비료, 인공 합성물을 사용하여 지구 환경에 멸종과 오염을 만들어냈다는 의미에서 네덜란드 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인류세’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2000년경이었다.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전문가들이 인간 세계와 지구에 대한 진단을 제시하였다. 제이슨 무어 같은 사람은 식민주의적인 생산 체제, 글로벌한 자본주의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지구 생태계가 받은 영향에 주목하여 ‘자본세’라는 말로 대응한다. 그들은 아마존 유역의 토착민이 선진국의 시민과 같은 방식으로 이 지구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한편 도나 해러웨이는 이들 용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대안적 용어로 ‘술루세’라는 용어를 창안하였다. 땅 아래 숨어 있는 힘, 즉 지구 차원의 촉수권력들이 모여 재구성하는 시공간성에 주목한 것으로 거기에 얽혀 있는 인간 이상의 것, 인간 아닌 것, 비인간적인 것, 부식토로서의 인간 등을 포함한 용어이다. 피난처를 재구축하고, 전면적인 회복과 재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힘들에 합류하는 것이 인간이 현재 기울일 수 있는 가능한 노력이라고 말한다.²

정세랑의 소설 「리셋」에서는 미래 사회 거대 지렁이들이 지구에 출현해 건물들을 집어 삼킨다. 인간들은 “지렁이들이 다다르지 않았던 땅 깊은 곳에 도시를 지었고, 지열 발전으로 에너지를 만들어냈고, 어떤 쓰레기도 도시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두려움을 원료로 인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³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급속한 전파로 팬데믹 사태가 벌어지고 인도와 중국 등의 생산 가동 라인이 멈추자 지구의 대기 상태가 달라지고, 인간의 활동 반경이 줄어들자 멸종 위기의 야생 동물들의 출현이 활발해졌다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금융시장의 붕괴와 실업률 증가와 같은 경제적 난관만큼이나 기후 환경 변화로 인한 재해와 각종 재난의 위험성이 다른 어느 때보다 피부에 가까이 와 닿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인간이라는 가장 지적인 존재들이 효과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것이 지구이고, 생태계의 안쪽에서 순응하며 사는 인간들은 질병과 가난, 오염과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으니, 인간은 서둘러 사이보그가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혹은 너무 늦지 않게 인간 아닌 것이 지구에 도달해주어야 할 것 같다. 그 때도 여전히 시가 쓰여지고 있을까.

 

 

사이보그 직전의 인간들에게 아직 반성적, 비판적 자아가 남아 있어 고통의 언어들이 새겨진다. 밤마다 울음소리가 가득하고, 피가 뚝뚝 떨어진다. 돼지가 나무에 주렁주렁 열리는 밤이란 무엇인가, 어째서인가.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예요!
무덤 속에서 복부에 육수 찬다 가스도 찬다
무덤 속에서 배가 터진다
무덤 속에서 추한 찌개처럼 끓는다
핏물이 무덤 밖으로 흐른다
비오는 밤 비린 돼지 도깨비불이 번쩍번쩍한다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 있다! 뱀처럼 살아 있다!

피어라 돼지
!
날아라 돼지!

멧돼지가 와서 뜯어 먹는다
독수리 떼가 와서 뜯어 먹는다
파란 하늘에서 내장들이 흘러내리는 밤!
머리 잘린 돼지들이 번개치는 밤!
죽어도 죽어도 돼지가 버려지지 않는 무서운 밤!
천지에 돼지 울음소리 가득한 밤!
내가 돼지! 돼지! 울부짖는 밤!
돼지나무에 돼지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밤

- 김혜순, 「피어라 돼지」 일부(『피어라 돼지』, 문학과지성사, 2016)

 

시인은 구제역 파동으로 축산 농가들이 절망에 빠져 있던 2010년 어느 날 경기도 땅 어느 곳을 여행하다가 수만 마리 돼지가 한꺼번에 땅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마음에 충격이 커서 며칠간 잠을 이루지도 밥을 먹지도 못했지만 그 상처로 시를 쓸 수 있게 된 것은 수년이 지나서였다고 한다.⁴ 경계를 넘나드는 진술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상처와 고통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산 채로 구덩이 속에 처박히는 돼지를 보며, 그런 방식으로 인간 사회가 굴러가서는 안 된다는 뼈아픈 자각은 돼지를 동물이 아니라 식물로, 들짐승이 아닌 날짐승인 것처럼 그려내는 동력이 된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느끼는 부끄러움은 수치심에 가깝지만 자기 자신 스스로 느끼는 부끄러움은 죄의식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움과 죄의식이야말로 인간이 지니는 고유한 감정으로 이것을 느끼고 처리하는 과정이야말로 좀 더 나은 사회로 갈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감정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도 동등한 지위를 부여할 때 생길 것이다. 상처와 고통은 상하 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평행 관계로부터 온다. 수직적 권력이 아니라 수평적 감각으로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이라 해야 할까. 그러니까 ‘나’는 ‘너’와 함께 존재하며 ‘너’의 고통과 피는 ‘나’의 것이기도 하여, ‘우리’의 목소리는 겹치게 된다. 기울기와 스며듦을 통해 목소리를 생산하고 인칭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야 말로 시의 위의와 가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애석하게도 도나 해러웨이가 ‘아웃사이더’, 경계에 선 존재들을 이야기할 때 실례로 든 것이 바로 산업화 시대 한국 사회의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였다. “성 산업과 전자 조립에 고용된 젊은 한국 여성은 고등학교에서 모집되었고, 집적 회로를 위해 교육 받았다. 읽고 쓰는 능력, 특히 영어 능력은 ‘싸구려’ 여성 노동을 다국적 기업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⁵ 산업화시대 저임금 노동자로 고용된 여성들에 관한 통찰이고, 오늘날 한국 사회 여성에게는 더 많은 배움의 기회, 사회 진출의 기회가 열렸지만 아직도 여성의 월급봉투는 동등한 조건의 남성 보다 적으며, 요직에 진출한 여성의 비율은 현저히 낮다. 여성은 더 많이 아프거나, 아파도 숨죽이거나, 아파서 죽어간다. 여전히 여성은 더 많은 눈물의 생산자로서 살아간다. 날개 달린 죽음에 더 가까이 존재한다. 약자로서 여성에게는 종종 애도의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겨드랑이가 푸드덕거려 걷습니다
커다란 날개가 부끄러워 걷습니다
세 든 집이 몸보다 작아서 걷습니다

비가 오면 내 젖은 두 손이 무한대 무한대

죽으려고 몸을 숨기러 가던 저 새가
나를 돌아보던 순간
여기는 서울인데
여기는 숨을 곳이 없는데

제발 나를 떠밀어주세요

쓸쓸한 눈빛처럼
공중을 헤매는 새에게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고
들어오면 때리겠다고
제발 떠벌리지 마세요

저 새는 땅에서 내동댕이쳐져
공중에 있답니다
사실 이 소리는 빗소리가 아닙니다
내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 「날개 환상통」 일부(『날개 환상통』, 문학과지성사, 2019)

 

밤의 도시를 걷는 일은 여성에게 자신의 존재를 새처럼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우는 새이고, 더러운 새이다. 복부에 창이 박힌 새이다. 새는 ‘나’이기도 하고, ‘나’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한데 이 분리와 이탈은 임박한 죽음을 예고한다. 화장실에 숨어든 새,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나’를 위로한다. 시인이 시집 『날개 환상통』에서 줄곧 사용하는 ‘새하다’는 조어는 좀처럼 파악이 되지 않는다. 뜬금없고 불손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이상한 해방감을 준다. 나는 내 인생에도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다. 평범한 안온함 속에서 불쾌하고 억울한 느낌이 고개를 쳐든다. 거부하고 싶지만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나서도 미움과 원망을 지우지 못한다. 착란과 환상 속에서 발을 떼는 기분. 그건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를 빗소리로 느끼는 것과 기묘하게 닮아 있다. 가짜 빗소리가 이 세계를 몽땅 지웠으면 하지만 이 세계는 그리 쉽게 허물어지지 않으니 고통은 계속될 것이며, 사건은 번복될 것이다.

근래의 나는 논리적인 사유의 언어가 뻑뻑하게 느껴지고, 인식과 상상의 도구로서의 언어에도 다소 질린 기분이 든다. 말놀이와 언어유희도 공허하게 느껴진다. 혁명과 저항의 도구로서 언어가 가졌던 생경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대 인간의 삶과 호흡하는 실질적인 언어에 대한 갈망이나 바람이 점점 더 강해진다. 그래서일까. 다른 목소리를 참조하며 이질적인 것과 접합으로서의 사랑을 꿈꾼다. 시 속에 갇히지 않고, 시 아닌 것에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고, 시 바깥의 것에 눈을 돌려본다. 그러니까 시가 갖는 경계 탐색의 언어로서의 가능성을 시와 시 아닌 것과의 습합에 두고 생각해본다. 시가 시를 낳는 자기 복제로 장르를 추동하지 않고, 다른 세계를 꿈꾸는 미지의 언어가 시가 되기를 바란다. 시적인 것을 지향하는 스타일의 복사는 너무 지루하다. 시적인 것의 범주와 테두리는 허상에 불과하다. 시의 형식과 내용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언제라도 움직이는 것이 장르이다.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시적인 것에 나는 더 끌린다. 그런 언어들은 위계와 권력에 무관심하다. 코가 발달한 언어가 아니라 귀가 발달한 말이라 해야 할까. 중심을 향한 지향을 거절하고 상하복종의 위계를 거부하는 일은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능력일 것이다. 교감과 배려, 연민과 사랑은 우리가 언어를 다루는 궁극의 이유일 테니까 말이다. 꽃잎과 나비 사이, 실체와 허상 사이에 인간의 삶은 늘 애매하게 걸려 있는 것 같다.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 시를 읽고 쓰고 싶다.

 

 

 

각주

1) 이지언, 『도나 해러웨이』, 커뮤니케이션북스, 2017; 김은주,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봄알람, 2017 참조.

2) 도나 해러웨이, 「인류세, 자본세, 대농장세, 툴루세: 친족 만들기」, 김상민 역, 『문화과학』, 2019 봄호, 168면: 나희덕, 「‘자본세’에 시인들의 몸은 어떻게 저항하는가」, 『창작과 비평』 2020 봄호, 87쪽 재인용; blog.naver.com/ysh2084/221845588824 참조

 

3) 『목소리를 드릴 게요』, 2020, 아작, 79쪽.


4) 황현산, 「거꾸로 선 화엄세계」 김혜순 시집 『피어라 돼지』, 『중앙일보』, 2017.1.


5) 이지언, 『도나 해러웨이』, 재인용, 11쪽.

 

 

 

 

 

이근화(李謹華) | 2004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칸트의 동물원』 『우리들의 진화』 『차가운 잠』『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등. 김준성문학상, 현대문학상, 오장환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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