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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성영희-식은 꽃 식은 꽃 꽃들은 화려한 색깔로 뜨겁거나 차갑다 이미 뜨거운 계절에서 핀 적이 있는 조화는 식은 꽃이다 꽃피는 공장 조립되는 꽃들 씨앗이라고 말한다면 넓고 흰 천이다 그렇다면 화단수공업의 일꾼은 햇살 아닐까 꽃잎 한 장 한 장 붙여서 꽃을 피우는 동안 아무도 모르게 재료들을 가져오는 것이다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온다 목련 핀 자리에 장미 넝쿨이 지나가고 깡마른 나뭇가지, 무더기무더기 흰 꽃들이 지나간다 조화의 개화 시기는 계절이 없다 불 앞에서는 금방 화르르 지고 마는 식은 꽃들 조화에게는 불이 겨울일 것이다 꽃피는 공장 여공들은 저녁에 만개한다 시들지 않는 조화처럼 저마다의 꽃송이를 안고 퇴근하는 여공들 뚝뚝 떨어지던 졸음도 창문 넘어 집으로 간다. 여공 몇 명만 데려다 놓으면 사계..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석민재-신경 신경(神經) 감나무에서 떨어진 것은 갈비뼈 다섯 대가 부러져 병원 침상에서 고양이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잠시잠깐 저승 쪽으로 돌아눕다가 불에 덴 듯이 깜짝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것은 저 가마솥 때문이다 장작불에 달아오른 신음소리 때문이다 비명보다 빠르게 도망간 고양이 때문이다 쇄액- 쇄액- 저 날카로운 고양이 푹 고아질 고양이 가마솥을 할퀴는 고양이 관절이 아픈 고양이 시칠리아의 암소 시칠리아의 암소 시칠리아의 고양이 오늘도 뒤뜰에는 솥뚜껑에 큰 돌이 얹힌 채 푹 삶기고 있는 것은 석민재 | 2015년 『시와 사상』 등단. 201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김호성-돌아오는 사람 돌아오는 사람 비린 그늘을 헤집는다 몇 년 후의 날씨를 셈하는 기분으로 희미한 이웃들이 곧 가루로 변하듯이 긴 송곳니를 가진 남자가 강가에 서 있으면 숲은 텅 빈 상자처럼 버려진다 수면 위에서는 땀을 떨어뜨리고 물속에서는 뼈와 살을 찾는다 두 발이 떠오를 때 생기는 진동은 무당을 닮았다 스며들어서 너무 얕은 마음처럼 뒤꿈치로 물러나는 여행 창틈 사이로 몰래 흘러내리는 키득거림을 기록하기 위해 수건에 입술을 문지른다 고목과 고목 사이 떠다니는 혀가 사라지기 전에 손바닥 속의 거미는 자신이 쳐놓은 손금을 갉아 먹고 있다 김호성 | 2015년 『현대시』 등단.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김무웅-불순한 철문 불순한 철문 검고 무거운 것은 속이 뻔하고 처음 보는 것은 언제나 낯설지만 이 철문이 유독 그랬다 언젠가 맞닥뜨리리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날이 너무 빨리 왔다 문은 뒤에 화기를 감추고 서서 고객을 만났다는 듯이 내게 여유를 부렸다 도대체 이 문은 어느 편인가 소속이 선명하지 못했다 이편에 서 있으면서도 저편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일행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 친구는 누어서 들어갔고 문틈 사이로 불길이 잠깐 너울거리다가 철문이 철석 내려 닫혔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떨구고 울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관을 삼켜버렸다 다시는 볼 수 없다 이승과 저승 사이를 철문이 가로막고 선 것이다 김무웅 | 2015년 『문학시대』 등단. 시집 『맥박』. 미래시학작가회 회장. 2021 ARKO문학나눔선정도서.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채길우-우유급식 우유 급식 우리는 흰 우유가 지겨워 마시면 배가 아파오는 듯해도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피할 수 없었던 그것 일주일에 하루 나오는 초코 혹은 달에 규칙 없이 두어 번 받아먹는 바나나나 딸기를 손꼽아 기다렸지만 선생님들은 그때에도 흰 것만 마셨고 어른이 되면 어째서 하얀 빛깔을 더 좋아하게 되는지 물어보지 못한 채 부루퉁하고 미적지근한 태도와 더부룩한 뱃속에도 아랑곳없이 칠흑색 눈동자에 허연 분필 가루를 뒤집어쓴 어쩐지 너무 쉽게 지워져 버릴 것만 같은 잘못된 얼굴로도 우리는 역사를 외우거나 공식을 풀면서 쑥쑥 자라 누런 인종이 되어 갔다. 채길우 | 2013년 『실천문학』 등단. 시집 『매듭법』.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정이춘-가지를 잘라놓고 가지를 잘라놓고 지난해 마지막 눈발 날리던 날 나무들 가지 끝이 곧 부풀어 오를 연둣빛으로 아른거릴 때 윗가지를 송두리째 다 잘려 기둥처럼 우뚝 선 목단 풍 나무에 겁 모르는 직박구리 한 마리가 찾아와 몇 번 허공을 치고 날았다 잘려나간 가지 턱 상흔 위에 돋기 시작한 때늦은 사월의 싹눈들은 숨겨온 환지통(幻肢痛)을 앓고 있었지만 새는 무심한 듯 날개를 펴고 접고 한가로운 몸짓을 되풀이했다 땅에 떨어져 흩어진 잔가지들만 바람결을 거슬러 서로 엉켜 부딪히며 달라진 봄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이춘 | 2013년 계간 『문파』 신인상 등단. 시집 『답신』. 문파문학상. 창작수필문학상 수상. 문파문학회, 한 국문협, 창수문인회, 수수문학회, 소향음악회 회원.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안희연-열돔 열돔 나는 물개처럼 짖어요 그러면 당신은 물개는 개가 아니라고 말하겠지요 저길 봐, 저것 좀 봐 한낮의 동물원 물개의 코 위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공을 가리키겠지요 사람들은 환호합니다 코끝만 보다 집으로 돌아갑니다 미래를 아이스크림처럼 핥아먹고 불볕 속에서 잠이 듭니다 불볕, 이젠 제법 아늑하지요 그런데 나의 손은 왜 자꾸 미끄러지는 것일까요 깨진 계란이라는 짖음 꽁꽁 언 고기라는 짖음 발등을 찍고서야 무엇을 놓쳤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꽃병이 썩은 물을 위한 형식이 아니듯 시간은 뒤척이는 마음의 것, 나는 내 짖음의 형식을 찾아갑니다 코끝에 세계를 올려둔 기분으로 연일 무더운 날씨가 계속될 거라는 보도입니다 그 시각 물개는 더위를 피해 물속으로 뛰어듭니다 물속까지 따라붙는 환호 물속에서도 불은 꺼지지 ..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이순애-구름의 어깨에 기대어 구름의 어깨에 기대어 해 저물녘 강가입니다 서성이며 물소리 바람 소리 듣다가 문득 구름 소리 듣고 싶었어요 올려다 본 하늘 손짓하는 구름의 기다림에 너덜한 심장 한 켠 떼어 구름의 어깨에 기댄 채 속삭임을 들어요 내 마음속 들여다보며 서러워하는 구름 호통을 쳐 천지가 진동하기도 했죠 그대는 듣고 있나요 이 엄중한 가르침 진노한 구름의 언어를요 부서진 심장의 조각들이 무거워 가슴에 부둥켜안고 밤새 흘리는 눈물 당신의 창은 비닐 껍질처럼 얇아졌어도 내 영혼에 손이 없어 깨뜨리지 못합니다 오직 여자라는 이름으로 짓밟혀 내가 흘린 피로 당신의 마후라는 빨갛게 물들었죠 자랑스럽게 하늘에 날릴 수 있나요 구름의 어깨에 기대어 흘린 눈물로 안개꽃을 피우고 있어요 당신의 마음을 밝은 태양에 털어 말린 후 꽃다발을 드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