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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1년 가을호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수필마당] 김선화-황톳길 잔영 2

황톳길 잔영(潺影) 2

 

 

큰일 날 일이다. 여학생이 혼자 길을 가다가 괴한을 만난다면 그 자체로 공포다. 요즘 같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학교에서부터 보안요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아이들 스스로도 미리 교육을 받아 방어력을 기른다든가 묘책을 강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자랄 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저 쉬~쉬하며 키웠다. 자라면서 도움 될 만한 이야기도 애들은 들을 것 아니라는 윽박지름으로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돌려놓곤 하였다. 그러니 성교육이니 자기방어니 하는 말을 아예 알지 못하고 기껏 괴한이 나타나면 보리밭의 문둥이로나 몰아붙여 갔다. 그것부터가 우매한 가르침이었다. 아무리 콩을 팥이라고 들어도 스스로 깨우쳐 진실을 알아차릴 법하지만, 낯선 사람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방법은 재빠르게 도망치는 것으로 이해했다.


혼자 길을 걷는 시간이 많았다. 몇 안 되는 동네 애들이라 반이 갈리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은 어느 동네 누구인지 알 만한 스무 살 남짓의 청년이 산속에서 튀어나왔다. 앞뒤 인기척도 없어 쥐죽은 듯하다는 표현이 이런 것일 텐데,
그 길에서 워낙 생각이 많았던 아이는 사색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황토 평평한 모퉁이를 휘돌 무렵 불시에 등장하는 장정을 어찌 피해갈 수 있었으랴. 그가 고운 마음씨의 사람이라면 수줍은 설렘이라도 있었겠지만 알아주는 시시껄렁이요, 건달인 데에야. 머리카락은 덥수룩하니 겉옷가지도 칠칠치 못하기 짝이 없으며 힘만 세 보이던 어벙한 사람이 등하굣길 근처에 살았다. 느닷없이 뒤로 달려들어 어깨를 확 안아보고는 쏜살같이 산속으로 숨어들곤 했다.


나로서는 그와 맞닥뜨리지 않는 것이 커다란 바람이었다. 우리 오빠 같으면 교복 입고 중학교 다닐 시기부터, 혹은 이웃 오빠들처럼 객지에 나가 씩씩하게 돈을 벌어들일 나이부터 그는 짓궂은 행위로 채 크지도 않은 나를 놀라게 했다. 하물며 그는 내가 누구의 동생인지 다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돌아와 오빠에게도 일렀고, 언니에게도 일렀다. 그러나 그들도 겁이 났는지 직접 나서서 막아주지는 못했다. 동창인 오빠가 찾아가 흠씬 두들겨 패줬으면 하고 내심 기대를 했는데, 대단한 착각이었다. 싸움을 싫어하는 오빠는 얌전하고 착한 품행을 유지했다. 그렇다고 그가 늘 건달기를 보이는 것은 아니어서 나도 더는 식구들에게 고자질은 하지 않았다. 두어 차례 내 앞에서 씽긋 웃고는 꽁지 빠지게 달아난 뒤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은 까닭이다.


이즘 와서 동창생들 앞에 넌지시 그 얘길 털어놓으면 친구들은 전혀 몰랐다며 배꼽을 쥔다. “너희들이 혼자 다닐 때도 아무 일 없었느냐고?” 따지듯 들이대면 더 웃으며 내가 너무 일찍 커서 그랬나 보다 한다.


생에 각인된 공포의 시간은 당사자에게 있어, 인생이 저문다 하여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일을 초월하여 살아가는 것일 뿐, 아름답지 못한 기억보다 행복한 순간들로 생의 길목을 채우며 일어서서 의연히 뚜벅뚜벅 걸어가는 거다. 이즘에 다시 그 무렵으로 돌아가 살아볼 수 있다면, 나도 얌전하고 모범적인 아이 딱지를 떼버리고 합기도 몇 단 정도는 거뜬히 보유할 것 같다. 하여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어처구니없어 미소가 고이지만, 그때의 시시껄렁이를 한바탕 둘러치기 하고 싶다.

 

 

 

 

김선화 | 1999년 『월간문학』 수필, 2006년 청소년소설 등단. 수필집 『우회(迂廻)의 미(美)』 외 8권, 시집 『빗장』 외 3권, 청소년소설 및 동화 『솔수펑이 사람들』 외 2권. 월간 『한국수필』 편집국장. 한국문협작가상, 한국수필문학상, 전국성호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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