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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1년 가을호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수필마당] 심웅석-차의 정서

차(茶)의 정서

 

 

저녁 시간에는 아내와 함께 거실 의자에 앉아 TV에서 나오는 트로트를 본다. 아홉시 좀 넘으면 한 문우님이 전해주신 차를 마시는데 그 녹차, 꽃차에서 향이 나는 것을 처음 느껴본다. 전에는 향이 난다는 말만 들었지 밍밍할 뿐이었는데, 이 차는 잘 만든 고급품인가 보다. 저녁이라 커피는 피하고(녹차에도 소량의 카페인 있음), 때에 따라 생강차 대추차 레몬차 등도 마신다. 우리 정서에 맞는 트로트 노래를 들으며 차를 마시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행복한 시간을 살고 있다는 감정에 젖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시간이 없었다. 대개는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일상이었고, 떠들썩한 모임에 여유 없는 인생은 술과 함께 비틀거리며 세월가는 줄 모르고 살아왔다. 이제 나이 들어 생활이 바뀌니 술 대신에 차를 마신다. 차를 마시면 마음을 진정시키고 기분을 안정시켜 잡념을 없앤다는 다도(茶道)는 최초에 중국에서 기원하였다한다. 당-송 간에 형성된 다도는 남송 소희 2년에 일본 승려 영서(榮西)가 차 씨를 일본으로 가져가 일본에서 귀한 생활문화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의 영향인지 커피를 많이 마시고, 중국이나 일본처럼 다도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혀끝에 감기는 차의 향기는 커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맛이다. 녹차 선물로 우연히 다도 근처에 닿게 되어, 마치 산사山寺에 앉아있는 느낌으로 내성수행(內省修行)의 시간을 맛보게 된 것은 행운이지 싶다.


세월이 흘러,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앞만 보고 달리며 난 체하던 젊은 날들이 하늘에 흐르는 저 흰 구름처럼 덧없이 보이는 나이가 되었다. 천천히 산책하면서 조용한 길가의 찻집에 가끔 들르며 산다. 찻잔을 왼손에 받쳐 들고 오른손으로 돌려 마시는 다도가 아니더라도, 고독한 분위기는 사색하기 좋은 조건이 된다. 창 넓은 카페에서 조용히 찻잔을 앞에 놓고, 예쁜 개인 주택들과 그 위로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 옛날 친구들이 생각난다. 함께 어울려 등산 다니던 일, 돈 없이 무작정 바닷가로 무전여행 떠나던 학창 시절, 티 없이 맑은 우정으로 속마음을 주고받던 일들이 그리움으로 달려온다. 가정교사 하면서 공부에 쫓기면서 사랑하던 여인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나중을 기약하다가 떠나보낸 슬픔은, 이제 가난한 낭만으로 잠긴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날들은 이제 다 지나고, 조용히 차를 마시는 계절이 된 것이다. 차를 마시는 다도란 무엇인가? 여러 말씀이 있지만 중국의 주작인周作人 선생은 “바쁜 와중에 한가로움을 찾고, 고달픔 속에 기쁨을 찾는 것으로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을 향수享受하면서, 찰나에 영원함을 체험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씀은 겨우 다도의 근방에 다가간 내게도 어렴풋한 위안이 된다. 생각해 보니 차를 마시는 다도는 우리에게 행복을 주고, 그리움과 낭만을 주고 또 모진 세상을 살아가는데 위로와 희망을 준다. 차茶는 희로애락의 파도타기를 하며 살아가는 인생에서 가끔 나를 돌아보는 마음의 길동무가 된다는 생각이다.

 

 

 

심웅석 |2016년 계간 『문파』 등단. 시집 『시집을 내다』 『달과 눈동자』 『꽃피는 날에』 등. 수필집 『길 위의 길』 『친구를 찾아서』. 2020년 제13회 문파문학상 수상. 2017년 용인시창작지원금 수혜. 한국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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