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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1년 가을호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수필마당] 박현섭-가을, 그리고 소리들

가을, 그리고 소리들

 

 

창틀에 매달린 귀뚜라미 소리 정겨운 백로다. 어김없이 순환하는 계절의 한 모퉁이, 저녁 안개처럼 슬그머니 가을 자락이 내려앉는다. 가을은 기억 저편으로 잊혀져간 소리들을 더 잘 기억해 내는 것 같다. 긴 가닥 거미줄처럼 오래 전 추억의 소리를 올올이 잡아 당겨준다. 세상에 존재하는 갖가지의 소리, 그중에 더욱 도드라지는 건 예전 어머니 다듬잇방망이 소리다.


어머니는 손부리가 야무진 분이었다. 가을걷이를 서두르는 아버지를 거드는 한편, 겨울 채비를 서둘러야 하는 잡다한 집안일들이 어머니 동동걸음을 잡아당기던 시절이었다. 바느질 솜씨 좋은 어머니가 지낸 섣달은 더욱더 바빴다. 잿물에 하얗게 바래진 광목 이불 홑청을 두드리던 방망이 소리에 기억이 먼발치에 서있다. 고만고만한 형제들이 한 이불 속에서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서로 이불자락을 잡아당겨 장난질을 칠 때마다 사각거리던 무명 홑청 소리가 제각각 흩어져 버텨가는 형제들 발자국 속에 묻혀있다.


설빔으로 색동이거나 벨벳 자투리 천으로 만들어진 깡통 치마이거나 추석빔으로 연두 치마에 노란 갑사 저고리를 입혀 호사를 누리게 해주던 어머니다. 해소를 달고 살던 어머니 밭은 기침 소리가 잊히지 않는 고향 초가집 사랑채 모퉁이에 두레박 우물이 있었다. 새벽 먼동이 틀 무렵이면 조반 준비에 바쁜 이웃들이 돛배처럼 만들어진 두레박을 우물로 떨어트리던 소리에 단잠이 깼다. 이웃들의 아침 문안 속에 자배기에서 보리쌀이 닦이던 소리마저 청량한 아침이었다. 지금은 자고 깨면 눈 마주쳐 인사 나눌 이웃이 없다.


철부지 시절, 집 앞 논둑을 고무신 벗어들고 달려가던 긴 둑 너머, 저수지에 물이 찰랑거렸다. 아들을 못 낳은 여인네들이 빌고 또 빌면 소원이 이뤄진다던 전설의 너럭바위 옆 저수지에 감청 빛 물속으로 여럿의 버드나무가 발을 담그는 곳이다. 물속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나무 발꿈치에 숨어있던 참붕어가 햇살 따듯한 수면 위를 튀어 오르곤 했다. 아버지는 마을 어른들과 저수지 근처 개울에서 가끔 천렵을 하셨다. 아저씨들과 송사리, 버들치, 피라미를 몰아가며 물풀을 자근자근 밟을 때 찰방거리던 물소리가 곁에서 들리는 듯 아련하다.


아득한 그 소리들이 지금은 고향에 없다. 진달래 화사하던 앞산 뒷산 다 깎여나간 그곳에 빼곡하게 들어선 공장에서 기계소리가 요란할 뿐, 고향 옛집 터에 들어선 사람들도 당연히 낯설다. 깊어 가는 가을을 재촉하듯 빗소리가 후두두 거린다. 한결 스산스레 굵어지는 빗소리가 바람결에 나뒹굴며 바삭거리는 갈잎처럼 가슴에도 바람소리가 지나간다. 윗옷을 아무리 두껍게 걸쳐도 어깨가 시리다. 버드나무가 세월의 갈피들을 가닥가닥 퍼 올리며 시간을 더해가고 있을 저수지 둑길을 언제 한번 걷게 될까.

 

 

 

 

박현섭 |2007년 계간 『문파』 수필부문 등단. 수필집 『첫, 그리고 다시』. 제 28회 경기도 문학상(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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