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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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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류성훈 - 공회전 금지구역 공회전 금지구역 머릿속에서 타이밍벨트가 돈다 늘 잔기침 소리로 깨어나 슬금슬금 다시 누우려 드는 새벽연기 아무도 내몰리기 전의 주차장에서 추운 벼랑 끝에서 융자 갚을 방법을 모색하면서 어제의 위치에너지는 벌써 고무 타는 냄새 입으로 내뿜는 배기가스 한 모금이 ‘공회전 금지구역’을 하얗게 밀어낸다 문을 닫으면 어깨가 손끝에서 깨져 구르는 불꽃처럼 어긋나기도 하는데 어깨가 아닐 지도 모르는데 오일 갈 때 한참 지났는데, 가계(家計)의 흡기 매니폴드에선 늘 구질구질 소리가 나고 하나만 더 피고, 회전하는 물체의 운동에너지는 나날이 망가져 가는 일과 쪽으로 발을 구른다 다시, 라는 개념이 없어진 세상에서 범사에 분개할 때까지 오래 머물 자신도 없어질 때까지 가야지, 차가울수록 더 짙은 안개를 풀어놓는 운동에너지..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김태실 - A4-16 A4-16 백지로 돌아가기, 어렵지 않아요 여행용 가방에 들어가 몇 시간 몸을 숨기면 조용히 하얀 종이로 변하지요 숨구멍을 짓누르는 무릎의 힘을 받아도 흰 구름으로 바뀌곤 해요 그동안 입었던 옷과 신발 그동안 만났던 인연과 사랑이 한 장의 종이가 되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백지에 심장을 찍는 일은 너무 어려워요 사진처럼 붉은 삶을 찍어 놓기에는, 남은 자들의 기억에 화인처럼 펄펄 끓는 쇠의 온도를 새기는 일은 힘들어요 우리가 기억 될까요 기억이 세상을 바꿀까요 세상의 억울한 죽음은 사라질까요 당신의 눈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우리는 누군가의 간절한 그리움입니다, 그 간절함은 같은 이유하나로 백지로 떠나요 싱그러운 나뭇잎에 통곡을 실은 소리 없는 울음이 바람에 실려 옵니다 물컹한 글씨가 새겨집니다 * 1. 9..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손미 - 생각하면 아직 열이 나서 생각하면 아직 열이 나서 빙과를 떨어뜨렸다 녹아서 떠내려 가는 집 잡혀가는 집 빙과를 핥는다 집을 핥는다 쓸고 닦는다 이토록 무거운 나를 어디에 둘까 빙하가 녹으면 오래된 것이 돌아온다 아주 오래 전에 우리는 잘못을 했지 빙과를 핥으면 녹는 죄 집은 떠내려 간다 나의 방은 매번 바뀐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어디부터 부서졌을까 누가 그랬을까 나는 너를 개입시킨다 내가 생각하면 네가 오는 집 너는 나와 함께 빙과될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우리는 잘못을 했지 냉동된 잘못이 녹아서 서로를 미워하게 하는 것 곧 잡혀갈 것처럼 웅크리고 있는 빙과 얼어있는 기억들을 깨문다 숨겨 놓은 잘못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마음 세계의 빙과들이 녹는다 손미 | 2009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양파 공동체』 『사람..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탁현미 - 낡은 곰 인형 낡은 곰 인형 간밤에 내린 비 온 숲이 말간 얼굴이다 수많은 유리창들 퍼즐 한 조각씩 품에 안고 아침을 여는 대학병원 몸 한구석에 달린 맹장처럼 지하 1층 한 구석에 자리한 ‘핵의학과’ 스르르 로비의 문이 열리며 눈만 반짝이는 외계인들이 들어온다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아 앉는 눈들 한 편의 무성영화가 지나간다, 조용하다. 소리 없이 스쳐지나가는 휠체어 아주 작고 가는 팔 안에 꼭 안겨 있는 낡고 낡은 곰 인형 갈색 벙거지를 눌러쓴 무심한 눈이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알 수 없는 막막한 슬픔이 가슴 속 깊이 밀물처럼 밀려오고 예고 없이 물안개가 자욱해진 눈으로 소녀의 뒷모습을 배웅한다 저 작고 가냘픈 어린 외계인은 어느 별에서 왔을까 두 손을 모은다 탁현미 |2009년 계간 『문파』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지하선 - 그 잠의 옷 그 잠의 옷 어젯밤 얼어붙은 저승의 빗장을 풀고 어머니는 옷 보퉁이를 이고 오셨다 자정의 바닥에 버려진 신열을 달래며 입혀주신 갈색 외투, 등줄기로 흐르는 보드라운 온기가 통증을 어루만지며 잠결을 출렁 였다 어머니는 평생 나의 포근하고 두터운 옷 이었다 삐꺽대는 무릎으로 흐린 전등불 고이고 온밤을 꺼내든 손목 시큰거려도 자신을 펼쳐놓고 이리저리 마름질하여 수천수만 벌 옷을 지었다 사시사철 몸을 비운 어머니를 걸쳐 입고 폭염의 그제도 어제의 폭설도 무사히 건너면서 그저 빛깔고운 날개만 펄럭였다 때로, 삶의 모서리에 찢긴 옷자락 구겨진 주름이 한물간 유행이라고 착착 접어 구석에 쟁여놓고는 늘 그렇게 그 자리에 있겠거니 무심했다 접힌 갈피갈피 세월이 좀 슬고 실밥 터진 솔기 낡아 삭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 순간..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전옥수 - 1인 시위 1인 시위 푹 눌러쓴 벙거지 모자 가로막은 마스크 사이로 시린 별 하나 깊은 강을 건너고 있다 검은 패딩 속에 꼭꼭 숨겨진 육신 무말랭이 같은 손에 들려진 피켓 한 장 매직으로 갈겨쓴 붉은 외침이 오가는 발길들 애절하게 붙들어 모은다 추운 계절 버티며 바람처럼 들고 나는 저 여리고 긴 투쟁 어린 속살 지키려 온갖 모순 앞에 홀로 선 ‘양육비를 지급하라’ 무리 속에 숨어들어 박제된 수치 토해내던 계절은 어린 봄을 품에 안고 언 볼 부비는데 창살같이 흘러내린 고드름은 음흉한 미소 뒤로 덧난 통증 무참히 찔러댄다 가까스로 하얀 장갑 한 켤레 건네자 언 손등위로 붉은 노을 뚝뚝 떨어진다 전옥수 |2008년 계간 『문파』 등단. 시집 『나에게 그는』. 계간 『문파』 편집위원.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김유자 - 시간의 머릿결 쓸어주기 시간의 머릿결 쓸어주기 늑대가 마을의 송아지를 물어 죽였다고 한다 자신 보다 큰 송아지 목을 물고 늘어진다, 이빨이 동맥을 찢는 순간 두 개의 몸은 피를 뒤집어 쓴 뜨거운 덩어리가 되었다 바퀴벌레를 잡았을 때 호들갑이던 너는 송아지스테이크를 썬다 입 속에서 죽음이 녹아내린다 창밖엔 바람이 쥐고 흔드는 꽃잎들 깨지는 빗방울들 늑대의 이빨이 무뎌진다 빳빳하게 일어선 털들이 가라 앉는다 개가 되어 늑대는 품에 안긴다 오물거리는 입을 바라본다 종편에서 살인에 대한 드라마를 계속 상영 한다 여전히 몰려오는 시간의 머리채 오늘은 오늘의 목을 물어 뜯으며 태어난다 김유자 | 2008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고백하는 몸들』.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정연희 - 꽃피는 아몬드 나무 꽃피는 아몬드 나무* 푸른 화폭 가득한 아몬드나무 흠집 없는 하늘의 허공으로 내달리는 꽃가지 지금도 피고지고피고지고 타오르는 불꽃은 무엇이었을까 생은 멋대로 뻗은 나무처럼 달아나 저만치 서 있었지 끝없이 뻗어가는 분홍 하양 꽃잎들 낭떠러지에서 머뭇거리다 슬쩍 뒤집어 너울너울 나비 몸으로 돌아왔다 古木에 내려앉은 나비들 두 손 모은 정결한 손처럼 여린 날개 접어 옹이마다 입맞춤 한다 나비들 분분하다 *빈센트 반 고흐 그림 정연희 |2007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호랑거미 역사책』 『불의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