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마당/2020년 가을호

(28)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복효근 - 어슬렁, 새의 입장에서 어슬렁, 새의 입장에서 매화가 핀 가지에 직박구리가 며칠 째 날아와 앉는다 괜히 나뭇가지를 쪼아보고 꽃 사이를 건너다닌다 저기에 뭐 먹을 게 있다고 날아와 꽃잎만 상할 텐데 나는 조바심으로 마음을 바장인다 볕이 좋아 앞마당 뒷마당으로 어슬렁거리는데 직박구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번씩 찌구락째구락 뭐라고 조잘거린다 아마 새도 나에게 그럴 것이다 거기 무슨 먹을 것이나 있다고 옮기는 발걸음에 갓 깨어난 풀벌레나 밟을 텐데 내가 이 봄볕을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새도 피는 꽃을 어쩔 수 없어 어슬렁거리는 건지 모르겠다 누가 시킨 일이랴 더러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세상을 밀고 간다 새의 입장을 헤아리고 나니 심술궂게 부는 바람도 때 없이 찾아와 가슴을 후비는 옛 사람도 그러겠거니 한다 새는 날아가고 앞산..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이선영 - 럭셔리 가족 5 럭셔리 가족 5 우리집에는 비관주의자 둘이 삽니다 입이 짧아서 밥도 많이 안 먹고 허튼소리도 잘 안 하는 뾰족하고 날카롭고 걸핏하면 찌르길 잘하는 둘이 삽니다 그 가시와 송곳으로 세상 여기저기 푹푹 쑤시고 다녀서 그런지 자칭 잘나가는 둘이 삽니다 가늘어야 대세라는 비주얼 시대에 미처 살 붙을 새가 없어 볼 만한 대세로 삽니다 우리집에는 낙관주의자 둘이 삽니다 뚫린 게 입이라 먹어본 것도 많고 입이 심심한 걸 잘 못 참는 입안에 머금은 꽈리향미들을 터뜨리는 일밖에 만사 귀찮아서 무지무지 게으른 둘이 삽니다 오늘밤에 바깥세상이 망한다고 해도 집안에서 뒹굴 수만 있으면 알 바 아니라며 비주얼 세상을 보이콧하는 집순이 집돌이 둘이 삽니다 낙관주의자 둘은 음양오행 가운데 화(火)가 딱 하나라서 매사 타오르다 그치..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김상미 -플래시백 플래시백 수시로 나를 들락거리는 그와 그녀들 그때마다 내 몸에 쌓이는 피 묻은 돌멩이들 그 누구도 의식하지 못한 채 견고한 벽이 되고 나는 오늘도 그 벽에 기대 미처 몰랐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또 다른 그와 그녀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모두가 무한하고 모두가 유한하여 열 배, 백 배, 천 배로 증식해 나가다가도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구름처럼 흩어진다 날이 갈수록 그런 족쇄, 그런 흔적들은 위협적인 사냥개의 특성을 잃고 빛깔을 잃고 각각의 이미지로 각각의 이름으로 되돌아간다 나는 나 그와 그녀들은 그와 그녀들로 원래 그런 관계란 제 자신에게로 쏠린 전망 외엔 언젠가는 모두 바스러질 돌멩이들 나는 상심한 그 돌멩이들을 들어 이미 고된 연마가 끝난 그 관계의 수를 줄이고 그 관계의 온도를 식힌다 ..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장석주 - 밤의 별채 같은 고독 밤의 별채 같은 고독 - 자동기술법으로 당신은 지나가는 사람. 무지몽매한 몸으로 떠도는 우리, 우리는 아무 일도 없는 하루를 산다. 오후에 한가롭게 중국차를 마시고 책을 읽을 때, 당신은 다육 식물을 키우는 일에 열심이다. 우리가 서로를 잘 알려면 몇 억 겁의 세월도 모자란다. 천 개의 폐를 가진 밤, 바람이 스칠 때 별은 기침을 한다. 오늘 밤하늘에는 별의 기침 소리로 가득 찼구나! 건강은 인류의 과거다. 방광이 깨끗하다는 건 지독히 외로운 일이다. 외로움은 당신에게만 일어난 존재 사건이다. 외로움이 늘 슬픔을 부양하는 건 아니다. 나는 가끔 담낭에서 시를 끄집어낸다. 고양이는 노조를 결성하지 않는 유일한 야간 노동자다. 김밥 한 줄을 먹고 외투를 걸친 채 산책에 나선다. 눈사람이 서 있는 거리에서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