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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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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오늘 - 후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못을 박아 우기를 걸어 두면 바랜 벽을 기어오르는 검은 꽃 이불과 향은 한 다발이 되고 어둠의 시접이 창 쪽으로 접힌다 한때의 꽃이 피는 우기의 방 여전히 달큰한 검정 벽에 붙어 있는 식탁이 고요해서 불빛들만 시끄럽고 꽃은 소란을 지난다 한 사람을 보내고 누워 있는 방이 너무 넓어 여름을 몰아쉬는 동안 끈적하게 달라붙는 거짓말 되돌리고 싶은 마음을 꽃으로 모았으면 사막 몇 개쯤 덮고도 남았을 텐데 한껏 몸을 말아 발자국을 받아적다가 끄덕이다가 아, 다시 다시 한 사람을 지나치는 말의 씨앗들 도처에서 만발하는 검은 향 검정은 감정의 소용을 넘고 빗줄기를 타고 흐르다 어느 날에 덩그러니 걸린 묵음 한 사람이 멀어져도 잠시 울고 잠시 웃을 수 있고 시절이 지나도 그때의 향은 남는다 비의 갈피에 꽂..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최정우 - 몸 몸 내 손이 나를 기억 하는지 손금에 더듬거리는 사람이 읽혀진다 손가락에 걸러진 문자를 몇 올 잡아 당긴다 줄줄이 엮여 나오는 부패의 시그널이 또박또박 계단위로 굴러 간다 자지러지는 기계 소리 올라가는지 혹은 내려가는지 캄캄하다 손을 찾는 스위치가 몸처럼 숨어있다 성급하게 노리는 무엇이 황급하게 다가와 매달린 잠을 흔든다 찝찔한 웃음이 밤마다 쏟아져 내 몸을 더듬는 그 무엇 피가 거꾸로 흐른다 낯설게 서서 스위치를 꾹 눌러본다 조작된 내가 움직인다 이빨사이로 보이는 감각이 죽어가는 사이보그의 얼굴로 번진다 번진 미소를 바라보는 몽유병이 바람에 얽혀 세포분열을 시작 한다 최정우|2005년 『한국문인』 등단. 계간 『문파』 사무국장.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박순원 - 출근 준비 출근 준비 나는 아가미는 선택하지 않았다 꼬리지느러미는 필요 없어서 뺐다 손톱 발톱은 간단하게 준비하고 이빨은 가지런히 가지런히 삐죽삐죽 튀어나와 험하게 보이지 않도록 코는 코끼리처럼 길면 편할 수도 있지만 손이 두 개씩이나 있으니까 목구멍과 혓바닥은 아주 정교하게 섬세하게 최대한 최대한 언제라도 바로 바로 폐활량과 심장 박동을 점검하고 마지막으로 넥타이 넥타이 이 곱고 가느다란 긴 끈은 무엇인가? 박순원 | 2005년 『서정시학』 등단. 시집 『주먹이 운다』 『그런데 그런데』 『에르고스테롤』.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권정우 - 살구 꽃잎 살구 꽃잎 개울 건너로 달아나는 자기 그림자를 잡으려고 꽃잎이 흐롱시롱 꽃그늘을 벗어납니다 권정우 | 2005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등단. 시집 『허공에 지은 집』 『손끝으로 읽는 지도』.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박수빈 - 원고지 원고지 벼랑 같은 아파트들 언제부터 이 칸을 위해 역병처럼 사는지 마스크를 쓰고 마신 숨을 다시 뱉는다 밤이 되면 불 꺼진 口에 눕는 생은 행간 밖 무릎을 꿇다가도 낙타처럼 일어서고 싶은데 태양 아래 끓어오르던 그 길은 어디로 가고 삭제된 口들로 채워지는 공백 포클레인 자국이 길을 만들면서부터 파헤친 흙만큼 산이 생기고 나의 쓸모는 모래가 바퀴에 들러붙는 듯했다 누군가 타워크레인을 옮겨놓자 레미콘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시멘트 채운 몸에 눈물을 버무리며 바람의 설법에 귀를 기울이며 거대한 공사판의 나는 먼지로 사라지고, 살아지고 박수빈 | 2004년 시집 『달콤한 독』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청동울음』 『비록 구름의 시간』. 평론집 『스프링 시학』 『다양성의 시』. 학술서 『반복과 변주의 시세계』. 경..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김효선 - 이주민 이주민 어느새 나는 구릿빛 얼굴을 가졌다 검은 털이 듬성 박힌 울타리를 넘어가면 거기 왕따나무가 있대 누가 누굴 역모로 몰았는지 구릉은 울타리를 넘어 영험한 소문을 불러들였다 저녁 무렵이면 하늘은 원심력으로 나무를 끌어당겨 허공에 눕히고 새들은 소문을 잘게 부숴 깃털에 묻힌다 쥐똥나무꽃에 얼굴을 묻고 딱정벌레인 척 그렇게 살아도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지만 나는 어느새 구릿빛 피부를 가졌다 꿀꿀한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자전거를 내달렸지만 온통 검은 털만 뒤집어쓰고 돌아온 저녁 마을 입구엔 누구나 살기 좋은 마을이 말뚝처럼 깊게 파묻혀 있다 김효선 | 2004년 계간 『리토피아』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 시와경계문학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심재휘 - 주문진, 조금 먼 곳 주문진, 조금 먼 곳 강릉여고 근처에 모여 동기들이 자취나 하숙을 할 때 그녀는 이른 아침 시외버스를 타고 매일 통학을 했다 나릿가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시내의 머슴아들은 주문진 출신을 나릿가라고 놀리던 날이 있었다 강릉에서 주문진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세월을 따라 어떤 곳은 더 멀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곳은 가까워져서 사라지기도 했는데 명주군에서 지금은 강릉이 된 강릉시 주문진읍 닿을 듯 닿지 않던 조금 먼 곳이 사라졌다 아침마다 바다 냄새를 머리에 묻히고 온 여고생 말 한 마디 못 붙여본 그녀는 가물거리는 그날의 주문진 조금 먼 곳 심재휘(沈在暉) |1997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 『그늘』 『용서를 배울만한 시간』. 현대시동인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함기석 - 뒤 보이스 뒤 보이스 독이 퍼지는 하늘이다 블루베리 케이크 옆 비틀어진 손목이고 사각(死角)의 탁자다 그 위에 놓인 검은 브래지어 찬 구름이다 끓고 있는 빗물이고 차도르 쓴 이란 여인의 슬픈 눈동자다 몇 방울의 타액, 몇 점의 가지 빛깔 흉터들 새벽안개 속 무연고 무덤이다 아무도 없는 겨울 숲에 번지는 흰 총소리 뒤의 깊은 뒷면 납치된 피, 물속에서 피아노가 울고 있다 함기석 |1992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착란의 돌』 『뽈랑공원』 『디자인하우스 센텐스』 등. 박인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