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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마당

[영화 이야기] 홍유리 - 우주와 매혹의 영화,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해

 

 

 

 

우주가 영화의 소재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02년 조르쥬 멜리에스Georges Méliès의 <달세계 여행Trip to the Moon>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술사였던 감독은 자신이 그리던 상상의 세계를 움직이는 영상을 통해 재현해보고자 했다. 디졸브, 페이드 인/아웃, 매트 촬영, 이중 노출, 스톱 모션 등의 마법과 같은 특수효과들이 그의 손을 통해 탄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기법들은 아름다운 우주의 모습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집대성되면서 <달세계 여행>이라는 기념비적인 영화로 완성된다. 우주라는 소재와 영화 이미지의 특수한 기능이 만나 영화라는 매체가 보여줄 수 있는 매혹적인 영상 문법의 포문을 연 셈이다. 이후 표현 형식이 급진적으로 도약했던 영화사의 몇몇 지점들에서도 우주의 개입이 나타났다. 처음으로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하기 시작한 <스타워즈>(1977), 그리고 <아바타>(2009)와 함께 3D 영화의 화려한 귀환을 보여준 <그래비티>(2013) 등은 인류가 갖고 있는 우주에 대한 호기심과 영화 매체가 갖고 있는 스펙터클의 힘이 의미 있게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그래비티>는 크고 작은 배경으로 우주를 소환했던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우주 그 자체를 본격적인 소재이자 주제로 도입한 영화였다. 이 영화는 우주 정거장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주인공이 위성 파편으로 인해 동료들을 잃고 어렵게 지구로 귀환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명백하고 단순한 플롯은 영화를 통해 생생하게 겪게 되는 관객들의 긴장감으로 풍부해진다. 인류가 달에 첫발을 디딘 이래 우주는 더 이상 환상과 상상 속에서만 그려볼 수 있는 추상적인 세계가 아니라 어떤 형식으로든 접근 가능한 실체적인 세계가 되어왔다. 우주로부터 전해온 다양한 영상 이미지 자료들은 대부분의 인류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우주를 실감나게 전달해줌으로써 ‘현실감 넘치는 우주 영화’라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대다수의 관객이 진짜 우주를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더 진짜 같은 우주 여행’을 영화를 통해 경험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사색으로서의 영화가 아닌 체험으로서의 영화, 즉 톰 거닝Tom Gunning이 영화의 본령으로 보았던 스펙터클의 힘이 우주라는 소재를 통해 적극적으로 소환되고 있음을 말한다. 거닝은 본격적으로 서사가 개입되기 이전 스크린, 영사, 관객 등 영상의 메커니즘 자체가 스펙터클이 되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원시적인 형태의 초기 영화들을 가리켜 ‘매혹의 영화cinema of attractions’1)라 불렀다. 
 이때의 영화는 내용을 파악하는 것보다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순간의 경험, 오감이 겪고 있는 체험이 중요했다. ‘시네마cinema’에 극장과 영화라는 두 가지 의미가 공존하는 것처럼 ‘그 공간 안에서의 체험’이라는 DNA가 영화의 속성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래비티>가 보여준 흥미로운 점은 물리적인 체험의 순간이 사색의 과정보다 더 빠르고 직관적으로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었다. 우주라는 절대 고독과 고립의 공간을 시청각적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인간이라는 하나의 미물을 실감하게 했다. 우주라는 공간의 특수성이 영화의 3D 입체 영역과 만남으로써 즉각적인 감정적, 인지적, 물리적 체득을 이루고 이를 통해 주제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래비티>는 ‘우주 성찰 영화’라는 하나의 경향에 촉진제가 되었다. <인터스텔라>(2014), <마션>(2015), <스테이션7>(2017), <퍼스트맨>(2018), <애드아스트라>(2019) 등의 걸출한 영화들이 <그래비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중에서도 달 착륙 50주년을 기념하듯 등장한 <애드 아스트라>는 앞선 영화들의 성공을 발판 삼아 ‘체험하는 우주 성찰 영화’의 중간 정리 역할을 한다. 특히 <그래비티>의 스펙타클과 체험, <인터스텔라>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영웅 귀환 서사, <퍼스트맨>의 내적 침잠과 자기 고백의 궤적을 좇되 나름의 방식으로 <애드 아스트라>만의 방법을 찾는다. 
‘애드 아스트라’는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해per ardua ad astra’라는 라틴어 문구에서 인용된 것으로 아폴로가 아스카니우스의 역경을 ‘별을 향한 여정’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 영화는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주인공 로이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해 떠나는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어느 날 태양계를 교란하고 지구의 생존을 위협하는 써지 현상이 발생한다. 로이는 이것의 근원지가 해왕성 부근에 있던 아버지의 우주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박 수 80을 넘기지 않는 침착하고 유능한 우주인이지만 영웅이라 믿었던 아버지의 어두운 실체가 드러남에 따라 평정심을 잃고 비행사로서의 자격도 박탈당한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와의 재회에 성공하지만 그가 마주하게 된 것은 일평생 허상을 좇다 소중한 것을 놓쳐버린 초라한 노인이자, 로이 자신의 미래 모습이었다.
이 영화의 플롯은 서구 문화의 원형인 그리스/로마 신화를 차용함으로써 복잡함과 모호함을 최소화하되, 주인공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깊이를 더한다. 로이는 아버지를 롤 모델로 삼아 유능한 우주비행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살아왔지만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로 인해 타인과의 교감에 실패하고 철저하게 고립된다. <인터스텔라>가 ‘인류의 가장 큰 무기는 과학과 기술이 아닌 사랑이라는 감정’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다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그 감정의 문제에 방점을 두되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아버지는 우주를, 로이는 아버지를 한없이 사랑하고 있지만 이들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공허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가장 빛나는 부분은 로이가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 과정이다. 로이는 국제 우주 안테나가 있는 지구 대기권, 지구인에 의해 위성 도시화된 달, 개척이 시작된 화성, 그리고 아버지가 머무르고 있을 해왕성으로 차례차례 이동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가 이전 우주 영화들이 갖고 있던 과학적 고증이라는 부담을 전혀 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비티>는 영화 시작 전, 우주 공간이 125도와 영하 100도, 무기압, 무산소로 생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자막으로 설명한다. <인터스텔라>에서는 웜홀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과학자 캐릭터가 종이와 연필을 사용해 상세히 알려주기도 한다. 공상과학 영화들 대부분이 스토리는 허구로 구성해도 그 배경은 최대한 사실에 근거를 둔다. 다른 우주 영화들도 ‘현실감 넘치는 우주여행’을 위해 과학적 근거를 고심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현실감 대신 낭만을 택한다. 막막한 우주 공간과 고즈넉한 로이의 내레이션은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어보았을, 고통과 고민이 사라진 낭만적 무중력 상태로 우주를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관객은 이 꿈속 같은 해왕성으로의 여정을 로이와 함께 하게 된다.
대기권에 있는 국제 우주 안테나의 주요 구조물은 사다리이다. 로이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모습, 사다리에서 떨어진 후 지표면으로 추락하는 장면은 대기권이 마치 사다리로 다다를 수 있을 만큼 지척이라는 인상을 준다. 달로 가는 여정은 현재의 장거리 비행과 다름없다. 우주선 안에서는 125달러짜리 담요와 베개를 팔고 달에 도착하면 기념품 가게가 지구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자동차 추격장면으로 구성된 달 시퀀스는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행위와 자본주의의 병폐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장거리 여행을 떠나 겪게 되는 일종의 모험과 일탈의 경험으로 다가온다. 

 

 

 


지구와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로이의 주변에는 심박 수 80을 넘기지 않는 사람들만 남게 되고 로이의 심리상태는 내적으로 더욱 침잠되어 간다. 화성으로 가는 우주선에서 실험 대상이었던 유인원들에게 공격당하는 장면은 그가 주변의 모든 인간적 관계들을 끊어내고 마침내 극단적인 고립의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홀로 해왕성에 도착하게 되면 이러한 상황은 절정에 다다른다. 이 장면에서 로이는 처음으로 우주선 밖을 나와 우주공간에 떠다니게 된다. 자신의 몸이 스스로 반동을 줄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라는 것과, 그 어떤 감정의 반동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버지의 공허한 눈을 통해 그가 허상을 좇아 살아왔다는 것, 그리고 그의 모습이 곧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침내 지구 귀환을 결심한다. 

이 영화의 절정이자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 순간은 로이가 맨몸으로 해왕성을 떠나는 장면이다. 로이는 우주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철판 하나를 방패 삼아 해왕성의 파편 띠를 관통하여 날아간다.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어보는 우주 유영의 상상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이 부분을 과학적 근거나 논리적 상황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 궁극의 판타지 장면을 가장 스펙터클하게 장식함으로써 관객이 로이와 함께 우주를 유영하게 하고 이를 통해 허상에 눈이 먼 아버지의 죽음과, 죽음을 각오함으로써 살고자 하는 로이의 의지를 체감하게 한다. 관객은 해왕성 유영을 체험하면서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직관적으로 흡수하게 된다. 
<애드 아스트라>는 무한하고 거대한 우주를 가로지르는 이 멀고도 험한 여정이 결국 인간의 한 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자기 성찰 과정이었음을 말한다. 이 영화가 우주와 영화가 만나 이뤄낸 또 하나의 성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 사이사이,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등장했던 강박적 내레이션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화의 메시지가 스펙터클의 힘을 통해 충분히 전달되었음에도 내레이션은 이미지의 내용을 재서술한다. “이젠 소중한 것에만 집중하며 살 겁니다. 삶이 어디로 흘러갈진 모르지만 걱정하지 않아요. 가까운 사람들과 의지하며 살면 되죠. 난 그들의 짐을 나누고 그들은 내 짐을 나누면서. 난 살아갈 거고 사랑할 겁니다.” 
스펙터클이 작동하는 곳에서 언어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로이의 대사는 존재함으로써 그것이 얼마나 불필요한지를 보여주었다. 아울러 우주 영화의 의의는 스펙터클의 힘에 있음을 다시 한 번 역설한다. <애드 아스트라>를 비롯한 우주 영화들을 점검하면서 발견한 부수적 결과도 같은 맥락에 있다. 영화의 역사에서 간헐적으로 등장해오던 우주영화가 2010년 이후 매해 성과를 내고 있는 상황은 영화 관람 형태가 넷플릭스와 같은 OTT 세상으로 급선회하는 것에 대한 경종, 즉 ‘스펙터클과 체험에 의한 매혹이 영화라는 매체의 본령’임을 시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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