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재미마당

[영화 이야기] 홍유리 - 덩케르크, 영화적 시간에 대한 놀란의 변주

영화 <덩케르크> 中

 

크리스토퍼 놀란은 그의 전작들을 통해 영화 속 시간의 문제에 대한 명민하고 독창적인 시각을 보여 왔다. 결말로 시작해 도입으로 끝을 맺는 완전한 역구성의 <메멘토(Memento, 2000)>나 현실과 꿈의 교차를 통해 동시 발생적이면서 또한 상대적인 시간의 흐름을 엮어낸 <인셉션(Inception, 2010)> 등 시간은 언제나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덩케르크>는 그의 오랜 노력에 깊이를 더하여 영화적 시간의 형식적 완성도를 높일 뿐 아니라 형식 자체로서 주제의식을 강화하는데 주력한다.
이 영화는 1940년, 프랑스 덩케르크 만에 고립된 연합군 구출 과정을 담고 있다. 독일군의 모습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전쟁의 구체적 양상이 아닌 개별자들의 생존 투쟁에 초점을 둔다. 혹자는 이 영화에서 적군의 공격을 자연재해에 견준다. 등장인물들에게는 하늘과 땅에서 쏟아지는 포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날아오는지 알 수 없는 것이며 개인의 의지로 빗겨갈 수도 없는 우연의 상황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내용적 측면에서의 생존을 형식적 측면에서의 시간과 결합함으로써 개인과 전체, 의지와 운명의 복잡성을 심도 깊게 조명한다.
<덩케르크>의 시간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이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덩케르크에 고립된 군인들의 생존 투쟁과 그들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정도로 요약될 것이다. 그러나 플롯은 복잡하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육지에서의 7일’, ‘바다에서의 1일’, ‘하늘에서의 1시간’이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영화 <덩케르크> 中

 

이 세 가지 상황은 분명하게 구분되지만 에픽 구성이 아닌 하나의 서사로 직조된다. 7일과 1일, 1시간은 육지, 바다, 하늘이라는 독자적 공간에서 각각의 구심점이 되는 인물들로 구성된다. 극의 후반에 다다르면 다채롭게 넘나들던 이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시공간에서 조우하게 된다. 이 상황들을 엮어내는 기본적인 플롯 전략은 교차 편집과 플래시 백, 그리고 플래시 포워드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기법들의 통상적 기능, 즉 다른 공간이지만 같은 시간대를 표현하는 교차편집, 진행하는 서사에서 회상을 삽입하는 플래시 백, 결과를 미리 보여주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 연대기적으로 구성되는 플래시 포워드를 좀 더 자유롭게 변주한다. 동시간이 아닌 상황에서 교차가 이루어지고 누군가의 과거가 누군가의 현재로, 혹은 그 역으로 등장하며 비선형적, 비연대기적 이야기들이 어느 지점을 관통한 후 하나의 흐름 속으로 녹아들기 때문이다.


각각의 시간대와 장소는 그들이 처해있는 서로 다른 압박감을 보여준다. 육지를 대표하는 육군 토미는 고립된 해안에서 끊임없이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하는 악몽 같은 일주일을 보낸다. 총격으로 떠밀려 해안에 도달하지만 하늘로부터 퍼붓는 폭격을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병사들에게 주어진 방법은 허허벌판 모래사장에 납작하게 엎드리거나 긴 행렬 사이사이 몸을 웅크려보는 것뿐이다. 포탄이 옆에 떨어지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극 초반, 전투 비행기에서 투하되는 포탄이 화면의 후경에서 시작해 전경으로 차례차례 다가올 때 가장 전경에 엎드린 토미가 살 수 있었던 것은 포탄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의 일주일은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시간이다. 따라서 시간의 단면을 나누었을 때 단면의 양적 측면이 다른 상황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영화 <덩케르크> 中


바다에서의 하루는 좀 더 다양한 상황에 놓인다. 영국정부는 덩케르크에 고립된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민간 어선 동원령을 내린다. 예상을 뛰어넘는 많은 선주들이 자신의 배를 내어주거나 직접 항해하여 덩케르크로 향한다. 도슨은 선박 징집 명령을 듣고 스스로 배를 몰아 바다로 나간다. 난파한 배의 잔해를 붙들고 간신히 살아남은 영국군 병사가 도슨에 의해 구출된다. 그러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던 병사에 의해 엉뚱한 목숨이 희생된다. 영국으로 돌아가자는 병사와 덩케르크로 가고자 하는 도슨이 설전 끝에 몸싸움을 벌이고 그들의 싸움을 말리던 조지가 상해를 입어 위중한 상태에 빠진다. 전쟁으로 이미 한 아들을 잃은 도슨은 덩케르크의 병사들을 구하는 것이 아들에 대한 도리라 믿지만, 선의를 갖고 함께 출격한 아들의 친구 조지는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그의 갈등은 지속되지 않는다. 도슨의 배를 공격하는 독일 공군의 총격과 독일군의 추격 끝에 바다로 추락하는 영국 공군, 덩케르크 만에서 탈출한 배가 검은 기름을 뿜어내며 침몰하는 상황이 도슨의 눈앞에서 지속적으로 펼쳐진다. 결국 조지는 사망하고 도슨은 지금 여기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이렇듯 도슨에게 주어진 시간의 단면은 육지에서의 그것보다 더 복잡하고 세분된다. 하루지만 일주일의 무게를 지니는 셈이다.

하늘에서의 1시간은 가장 촘촘한 단면을 갖고 있다. 파리어와 동료는 적을 공격함으로써 아군을 방어할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인 위치에 있다. 파리어 한명이 구할 수 있는 생명이 수십만에 다다르는 탓에 그가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은 분초를 다투게 된다. 더욱이 연료계기판 고장으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다른 인물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빠르게 흘러간다. 그러나 영화는 이들에게 영웅적 위상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파리어의 동료가 격추 당해 바다에 빠졌을 때 그를 구해준 것은 민간인인 도슨의 또 다른 아들이다. 도움이 필요한 자와 도와주는 자의 역할은 이 지점에서 교차된다. 그리고 서로의 역할이 상대적이고 상호적임을 보여주는 바로 이곳에서 지금까지의 세 가지 시간대가 하나로 수렴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형성한다. 이후 이야기는 모든 인물이 한 공간에 모이게 되며 선형적인 흐름을 이어나간다.
이러한 스토리 전개를 위해 시간은 어떤 플롯 전략으로 작동하는가. 잠시 화제를 돌려보면, 움직이는 이미지로 구성되는 영화에서 시간의 문제는 형식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오랜 논의의 대상이었다. 스크린 속의 디에게시스는 현재 진행형이지만 촬영 당시의 현실은 이미 과이므로 우리는 현재 진행형의 과거를 보는 셈이다. 따라서 영화의 시간은 현실과 과거, 그리고 상상적 세계로서의 미래가 자유롭게 혼재되어 있다. 이러한 시간 조직의 유연성과 가능성은 다른 어떤 예술 매체보다 영화에서 극대화된다. 따라서 영화의 본령을 추구하며 아직도 디지털이 아닌 필름으로 촬영을 고집하는 놀란에게 시간이란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며 가장 흥미로운 플롯 전략인 셈이다. 
<덩케르크>에서 일주일과 하루, 한 시간이라는 시간의 물리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이 세 가지 상황은 누구에게는 과거이며, 같은 상황이 누구에게는 현재나 미래이다. 이 시간 속에서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행동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미래에 어떤 역할을 한다. 예컨대 도슨의 배에서 정신적 충격으로 돌발행동을 하던 영국군 병사는 다음 장면에서 조난당한 토미와 병사들을 냉정하고 침착하게 지휘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배치는 영국군 병사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상반된 과거 모습을 보여주는 플래시 백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영화 전체로 보았을 때 영국군 병사의 이야기는 도슨의 구조가 먼저 등장하기 때문에 플래시 포워드가 되고, 토미의 에피소드에 등장한 지휘관으로서의 병사는 현재의 인물이 된다. 이는 단순히 순서의 복잡성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다양한 배경과 관계에 따라 어느 누구의 역할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어느 순간에서는 취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지만 어느 상황에서는 강하고 절제된 존재가 된다. 누구에게는 구조의 대상이지만 누구에게는 구조의 주체가 된다. 
토미가 보내는 일주일과 도슨의 하루, 파리어의 1시간은 영화 속에서 비슷한 분량으로 교차된다. 앞서 언급한 시간의 단면을 고려해볼 때, 그들이 느끼는 심리적 현실을 정량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세 가지의 시간대가 대등하게 배치된다. 토미가 포탄을 피해 필사적으로 바닥에 엎드려 있을 때, 다음 쇼트는 스스로 항해할 것을 결심하는 도슨으로 넘어간다. 도슨이 불안 증세를 보이는 병사와 몸싸움을 벌일 때 파리어는 연료계기판이 고장 난 사실을 알고도 회군 대신 덩케르크 행을 택한다. 그리고 세 시간이 수렴될 때 파리어는 도슨의 배를 엄호하고, 파리어에 의해 안전해진 도슨 일행은 물살에 떠내려가던 토미의 손을 기적처럼 잡아낸다. 이처럼 <덩케르크>에서 시간의 배치는 형식적 묘미로 작동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연과 운명 속에서 개별자들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지를 강조한다.
이와 같은 시간의 조직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물들의 이름은 영화상에서 한 번도 불리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을 통해 확인될 뿐이다. 이는 각각의 개성을 두드러지지 않게 하면서 전체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플롯 구조와 함께 고려했을 때 운명과 우연의 큰 흐름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분명하다. 조지는 죽고 토미는 산다. 민간인인 조지는 군인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나가지만 성난 병사의 실수로 배 안에서 죽고 만다. 프랑스군 깁슨이 난파하는 배의 문을 열어 토미의 탈출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도슨의 아들과 도슨이 살려낸 공군이 파도에 휩쓸려가는 토미의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파리어가 공격받던 도슨의 배를 방어해주었기 때문에 토미는 살아남는다. 토미에게는 영웅적 이타심도, 비범한 능력도, 살아남아야만 하는 명분도 없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목숨을 건진 다른 병사들 중의 하나가 되어 무사히 고국으로 귀환한다. 
이렇게만 본다면 인간은 운명이라는 격류 속에서 우연으로 좌우되는 미물일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개인을 배제하고 전체만을 강조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토미는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남았다. 단 한 순간도 자포자기하며 운명의 흐름에 자신을 버려두지 않았다. 도슨은 단 한 명이라도 더 구해내기 위해 전속력으로 덩케르크로 향했다. 파리어는 찰나의 순간에 자신의 목숨이 아닌 40만 연합군의 목숨을 택하며 회군 대신 진격을 택했다. 토미의 생존은 자신의 의지, 그리고 다른 이들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항구에 도착한 군인들에게 차와 먹을 것을 나누어주던 앞이 보이지 않는 노인은 토미의 얼굴을 만지며 “잘했다”고 말한다. 옆에 있던 군인이 “우리는 그저 살아 돌아왔을 뿐”이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자 노인은 “그거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승리에 대한 의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의지를 피력하는 처칠의 연설문은 토미의 목소리로 대독되며 영화의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영화 <덩케르크> 中


역사 속에서 개인은 이름도 얼굴도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개인은 전체를 이루며 전체는 개인의 작은 발자취 하나하나에 연쇄적인 영향을 받는다. 이 영화는 우연이라는 고약한 운명 속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 순간에 주어진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운명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일지 모른다. 나에게 다가오는 우연에 내 행동이 일으키는 또 다른 우연을 가세하여 거대한 운명의 흐름에 균열을 야기할지 모를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개인의 의지가, 개별자들이 모인 공동체의 의지가, 하나의 개별자로서 리더의 의지가 모였을 때, 어떠한 우연이 발생하고 그 우연 속에서 어떠한 기적이 탄생하는지 영화 <덩케르크>가 보여주었듯 말이다. 


홍유리 | 서강대학교 영상학 박사, University of Bristol, Film and Television production 석사,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석/학사. 박사학위논문 『다큐멘터리 영화의 수행적 실천 양상과 의미에 관한 연구-트라우마적 경험의 표현 방식을 중심으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