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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마당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 삶의 골수를 열망한 사내

Editor 박미경

 

저 황홀한 노랑의 향연, 제주의 감미로운 추억인 성산포 유채꽃밭이 한순간 트랙터로 무참히 뭉개졌다. 꽃의 학살이다. 가격 폭락으로 배추를 갈아엎고 양파를 갈아엎던 농부들의 모습을 볼 때는 그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십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상 초유의 코로나 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면서 제주, 삼척에서 갈아엎는 유채꽃밭과 신안 어느 섬의 백만 송이 튤립을 엎어버린 행위 앞에서는 분노를 넘어 자괴감마저 들었다. 무모한 관광객에게 ‘뽄때’를 보여주기는 했으나 인간에 대한 혐오는 한층 깊어졌다. 인간이 정녕 꽃보다 대단한 존재일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를 생각했다.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인 소로는 2년 동안 홀로 ‘월든’이라는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산업화가 본격화하기 전인 19세기에 이미 문명사회의 한계를 의심한 그는 기막히게도 200여 년이 지난 오늘의 현실을 내다본 것만 같다.

소로의 에세이 <한 소나무의 죽음>을 떠올린다. 산책길에 소로는 톱질 소리를 우연히 듣는다. 200미터쯤 떨어진 저 아래쪽에서 두 남자가 소나무를 톱으로 베고 있는데, 그는 두 나무꾼을 ‘난쟁이 인형’, 나무 밑동을 갉아 먹는 ‘비버’나 ‘곤충’에 비유한다. 마을에서 가장 큰 30미터 길이의 소나무는 위엄 있고 ‘고귀한’ 존재로 표현했다. 초라하고 잔혹한 난쟁이들은 나무를 쓰러뜨리려고 기를 쓰고 있고, 나무는 ‘그곳에 한 세기는 더 있을 운명이라는 듯’ 서 있었지만 결국 거대한 소나무는 쓰러진다. 소로는 그 모습을 ‘서서히 그리고 장엄하게 움직인다’ ‘전사처럼 녹색 망토로 몸을 감싸면서 깃털처럼 눕는다’라며 나무도 죽을 때는 신음을 낸다고 생각한다. 반면, 나무꾼 두 사람은 죄를 저지른 톱과 도끼는 내동댕이친 채로 ‘범죄 현장에서 도망치고 있다’고 비꼬았다.

“소나무가 이제까지 공중에서 차지했던 자리는 앞으로 200년간 텅 비어 있을 것이다. 소나무는 이제 단순한 목재가 되었다. 나무꾼은 하늘의 공기를 황폐케 한 것이다. 봄이 와서 물수리가 머스키타퀴드 강변을 다시 찾아올 때 그는 소나무 위에 자신이 늘 앉던 자리를 찾으려고 허공을 헛되이 맴돌 것이다. 그리고 솔개는 새끼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줄 만큼 높이 솟았던 나무가 사라진 것을 슬퍼하리라.”

그리고 마침내 소로는 ‘왜 마을은 소나무의 죽음에 조종(弔鐘)을 울리지 않는가?’라며 슬퍼했다.

제주 유채꽃밭의 수난과, 백만송이 튤립의 학살을 보고 조종을 울릴 수 있는 이 시대의 시인은 어디에 있을까.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변화와 교훈을 얻었다. 지루하던 일상의 소중함과 바이러스는 국경, 문화, 직업에 관계 없이 평등하다는 것,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 무엇보다 우리가 불필요할 정도로 가치를 부여했던 명품 ,사치품보다 중요한 것은 음식과 물, 약 등의 필수품이라는 사실이다. 뿐이랴. 국가봉쇄령으로 항공과 차량 이동이 제한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공통현상은 대기오염이 줄어 지구 환경이 깨끗해진 것이다. 인간이 멈추니 아픈 지구가 회복됐다. 코로나 19의 역설, 가치, 축복은 그렇게 가능했다.

이미 19세기에 의기양양한 문명을 의심하고 자연을 옹호하며 단순한 삶을 살았던 자유인 소로를 새삼 추억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길을 잃고 나서야, 다시 말해 세상을 잃어버리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서 있는 곳과 자신이 맺고 있는 무한한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 『월든』

 

코로나 19로 ‘길을 잃은’ 우리들에게 죽비처럼 내리치는 말이 아닌가.

그는 하버드대를 나왔으나 상류층으로의 진입을 거부하고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의 연필공장에서 일했다. 농부, 목수, 측량사 등 정직한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며 자연 속에서 사유하고 집필한 시대의 아웃사이더였다.

1845년 3월, 28세의 소로는 도끼 한 자루를 빌려 숲으로 향한다. 자신의 집에서 2킬로 남짓 떨어진 월든(walden)이라는 작은 호수의 언덕에 오두막을 짓기 위해서였다. 소로는 자신의 힘으로 그리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집을 짓고자 했다. 4달러를 주고 구입한 판잣집에서 판자를 얻어 헌 지붕 널과 벽 널, 유리 달린 헌 창문 등으로 지은 오두막집에 들어간 비용은 28달러 12센트였다. 당시 하버드대학 기숙사의 1년 방세가 30달러였다니 1년 방세도 안되는 돈으로 평생 거주할 수 있는 집을 지은 것이다. 그의 오두막에는 딱딱한 침대와 책상, 그리고 손님을 위한 세 개의 의자뿐이었으나 정신과 육체 활동은 누구보다 풍성했다.

오두막에서의 2년여 동안의 생활은 경작을 비롯한 일상의 노동과 자연의 면밀한 관찰, 산책과 명상으로 이루어졌다. 삶을 낱낱이 기록했고 그것은 자신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답이 된 책, <월든>으로 태어났다. 단순한 자연 예찬을 넘어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자 그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으려는 한 자주적 인간의 독립 선언문이었다.

1852년 출간 당시에는 별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물질만능주의에 대해 사람들이 염증을 느낄수록, 비인간성이 사회문제화되면 될수록 <월든>의 위상은 점점 높아졌다. 그가 자유롭게 사는 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겼다는 사실은 <월든 >곳곳에 나타나 있다.

“내가 숲으로 간 것은 온전히 내 뜻에 따라 살고, 삶의 본질적인 면에 부딪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삶에서 배워야만 하는 것을 내가 배울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또 죽음을 맞게 됐을 때 지금껏 제대로 살지 않았다고 후회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은 정말로 소중한 것이니까. 나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이런 목표를 단념하고 싶지 않다. 나는 깊이 있는 삶을 살며, 삶의 골수(骨髓)를 완전히 빨아먹고 싶었다. 삶이 아닌 것을 모조리 없애버리기 위해.”

‘자연 그대로의 것’ ‘정신의 풍요’에 무한한 애정을 가졌던 소로는 인위적인 안락과 조악한 물건을 얻고자 전 생애를 물질적 성공에 바치는, 절제와 지성이 없는 그런 삶을 어떻게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며 반문했다.

“단순하게, 단순하게, 단순하게! 부디, 그대의 일을 수백, 수천이 아닌 두세 가지로 만들어라. 백만 가지를 여섯 가지 정도로 셀 수 있도록 만들어라. 그대의 계산을 눈대중으로 할 수 있도록 하라.”라는 구절은 숲속 생활에서 소로가 얻은 수많은 깨달음을 함축하는 문구로 널리 인용된다.

소로는 이렇게 얻은 신념을 행동으로 옮긴 혁명가이기도 했다. 부도덕한 멕시코전쟁과 노예제도 반대의 뜻으로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며 감옥에 갇힌 적도 있다.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 불복종 권리를 행동으로 실천했던 경험을 토대로 부당한 현실과 억압에 대항하는 ‘시민의 불복종’을 집필했다. 이 책은 19세기말 시민운동의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다.

소로의 이러한 시민 불복종 정신은 당장에 정부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이후 많은 동지들의 삶의 지표가 되었다. 톨스토이, 간디, 킹 목사, 넬슨 만델라, 그리고 함석헌이 그의 길을 따라간 것이다.

소로가 보여준 삶은 더 많이 갖기를 바라고, 새로운 물질문명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혹자는 실패한 인생으로 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소로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것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삶의 정수(精髓) 만을 발견하기 위해 사람과 문명의 ‘자발적 거리두기’를 추구한 사람이다.

코로나 19의 또 다른 선물은 바로 지금, 나만의 ‘오두막’으로 들어갈 수 있는 멋진 기회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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