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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마당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 추한 것이 아름답다, 툴루즈 로트렉

 

 

Editor 박미경

 

아침, 식당에서 수프를 한 스푼 들이마신 어머님이,
“아.”
하고 나직이 소리를 지르셨다.
“머리카락인가요?”
수프에 뭐 언짢은 게 들었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아니.”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 스푼 훌쩍 입속에 흘려 넘기시고, 딴 생각을 하는 듯한 조용한 얼굴로 옆으로 향하여, 부엌 창밖에 만발한 산벚꽃을 쳐다보셨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사양斜陽』의 첫머리다. 수프를 마시는 어머니의 기품을 묘사하면서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천작天爵’-하늘이 내린 작위를 가진 사람으로 찬탄해 마지않는다. 
자식에게서 천작을 받았다는 평가를 받다니… 그 인상적인 풍경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후에 툴루즈 로트렉의 <아침 식사를 하는 로트렉 백작 부인>(1882)을 보던 순간 영화처럼 다자이 오사무 소설 속의 어머니가 오버랩 된 것은 참으로 절묘했다. 
하루를 시작하는 창밖의 아침 안개, 그 너머에 산벚꽃이 피었던 것일까. 하얀 시폰 드레스를 입고 단정히 틀어 올린 머리로 식탁 앞에 앉은 여인에겐 귀족의 기품이 느껴진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크림색 톤의 고요한 분위기는 공기마저도 희고 부드러울 듯하다. 찻잔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길엔 슬픔과 근심이 어려있다. 고통을 감내하는 기품이라고 할까. 깊은 생각에 잠긴 아델 백작부인은 툴루즈 로트렉의 어머니다. 로트렉은 18세에 이미 어머니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있다. 
로트렉을 떠올릴 때면 곱추였던 화가 손상기, 구본웅 등과 함께 어릴 때 앓은 소아마비로 평생 장애인으로 살다 돌아가신 나의 큰오빠가 생각난다. 오빠와 나이 차가 많아 당신의 소외와 고독을 공감하고 위로해 주지 못한 젊은 날은 내 심연의 오랜 죄책감이다. 주변의 모욕과 조롱을 인내하며 성장했을 당신은 역설적이게도 더없이 온화한 인품으로 누구든 배려하며 8남매의 어른으로 사셨다. 그렇듯 장애가 가져다준 고통의 꽃이었을까. “내가 다리가 조금만 길었더라면 그림 따위는 그리지 않았을 거야.”라고 로트렉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장애는 그에게 좌절의 저주와 예술혼의 축복을 주었다. 불행했던 삶을 불꽃처럼 소진한 천재들의 예술작품이 주는 통증은 서늘한 아름다움이다. 본디 예술의 토양이 축복보다는 재앙에서, 영광보다는 패배에서, 사랑보다는 실연에서 더욱 잘 자라는 습성을 가진 이유일지 모른다.
앙리 마리 레이몽 드 툴루즈 로트렉 몽파(Henri Marie Raymond de Toulouse-Lautrec-Monfa, 1864-1901). 긴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12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유명한 귀족 가문 출신이다. 백작의 작위를 가진 아버지와 서로 사촌 간이었던 어머니로부터 귀족의 혈통과 재산, 예술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유전적 결함까지도 물려받는다. 가문의 오랜 근친결혼 탓인지 로트렉은 어릴 때부터 병약하여 성장이 더뎠고 특히 뼈가 많이 약했다. 결정적으로 10대에 두 번의 다리 골절로 하반신의 성장이 멈추면서 호르몬이 상체로만 몰리다 보니 다소 기형적인 얼굴에 난쟁이 외형이 되고 말았다. 가문의 영광에 집착했던 아버지는 아들의 신체적 결함을 외면했고 화가로서의 성공 또한 부끄러운 일로 치부했다. 그러나 어머니 아델은 로트렉의 재능을 알아봤으며 열살 때부터 미술을 배우게 했다. 남편이 가정을 떠난 뒤 파리로 이사한 후 화가 르네 프랭스토에게 사사하도록 했다. 아들을 위해 기꺼이 포즈를 취하기도 했으며 지극한 모성애로 자신의 모든 에너지와 부를 아들에게 쏟아부었다.

 

 

 

 


14세부터 지팡이에 의지해 걸었던 로트렉, 30세에도 지팡이를 짚고 있는 사진을 보면 근사한 중절모에 세련된 양복과 외투로 멋을 낸 귀족의 태가 흐른다. 그런데 울고 있다. 안경 밑으로 흐르는 하나의 선은 아마도 안경 줄인 듯한데 내게는 그것이 눈물로 보인다.
150cm의 단신인 그의 별명은 커피포트. 혹은 옷걸이였다. 큰 몸통과 짧은 다리를 가진 커피포트는 남과 다른 그의 몸을 비웃는 상징이자 조롱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닮은 커피포트를 그린 그림에는 어두운 배경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반사시키고 있는 로트렉이 서 있다. 이처럼 그는 자기가 먼저 스스로의 장애를 풍자하고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이 싫어하는 동정과 연민을 미리 차단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작은 키를 의식해 유머러스한 농담을 즐기기도 했다.
“술에 취해 쓰러져도 괜찮아요. 난 이미 바닥에 있으니까.”

언제 어디서나 추함은 또한 아름다운 면을 지니고 있다. 아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곳에서 그것들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짜릿하다.    - 툴루즈 로트렉

 

 

 

 

 

로트렉은 세 번째 스승인 코르몽의 화실에서 왕따 당하는 괴팍한 무명화가를 만나게 되는데 서로 같은 과임을 직감한 둘은 친구가 된다. 고독과 술, 정신병원과 요절, 공통점이 많은 빈센트 반 고흐다. 당시 몽마르트는 파리 외곽 시골 마을로 집세가 다른 곳보다 저렴하여 반 사회 정치인, 예술가, 매춘부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로트렉 역시 어머니의 화려한 저택에서 몽마르트로 거처를 옮긴 후 귀족과 담을 쌓았다. 가난한 화가들도 몽마르트에 모여 예술과 삶과 사랑을 노래했을 터, 훗날의 거장들- 클레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반 고흐, 폴 세잔, 모딜리아니, 파블로 피카소 등등-이 이 언덕에서 만들어졌다. 
로트렉은 몽마르트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세기 말 파리의 흥청대는 카바레와 바, 댄스홀, 뒷골목을 탐닉했고 관찰했다. 비루함과 화려함이 엉켜 있는 이곳의 삶에 빠져 살던 로트렉이 사망했을 때 이런 부음 기사가 떴을 정도다.
“몽마르트에서는 그 어떤 카페 웨이터나 호텔 주인도, 그 어떤 여자도 이 유명한 난쟁이 남자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어릿광대처럼 그의 생애를 카바레와 심야 레스토랑에서 보냈다. 방탕과 흥청거림과 화려함과 법석으로 들끓는 파리의 한구석을 탐구하면서 말이다.” 

 

1889년 세계 만국 박람회가 열리고 에펠탑이 세워졌으며 카바레 물랭루즈가 개업했던 파리의 찬란한 시절, 로트렉은 물랭루즈에서 그림을 그려 주는 대신 아무 때나 입장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 몸과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곳, 더 이상 홀대받거나 조롱거리가 아닌 자유로운 공간을 찾은 것이다. 물랭루즈의 무용수나 매춘부 여성들은 그에게 가장 가까운 그림의 소재였으며 그의 뮤즈이자 조언자였고 때로는 연인이기도 했다. 화려하지만 쓸쓸한 세계, 구석구석 녹아있는 하층 계급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 여자들이 쉬고 있거나, 몸을 씻거나, 화장하는 모습, 심지어 성병 검사를 받는 모습까지 캔버스에 옮겼다. 어쩌면 물랭루즈 시대의 덧없는 삶에 대한 표현인지 모른다. 어쩌면 남루하고 천박한 여인들의 노골적인 모습 속에 자신을 투영했는지도, 육체적 열등의식을 잊기 위해 술을 들이켰을지도 모른다. 결국 환락가에서의 절제 없는 방탕한 생활, 매일 같이 마시는 독한 압생트는 중독으로 치달으며 매독으로 신음하기에 이른다. 불구의 고독과 좌절을 환락가에서 불태운 그는 환락가만을 주제로 모두 50여 점의 회화와 1백여 점의 드로잉을 남겼다.
회화를 넘어 로트렉이 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오히려 포스터다. 당시 물랭루즈 사장이 부탁해서 시작한 밤 문화 홍보를 위한 포스터는 단순하면서도 추상적인 기법으로 현대 포스터를 압도한다. 

 

 

 

 

 

 

<물랭 루즈, 라 굴뤼> 한눈에 들어오는 간결한 디자인과 대담한 색채, Moulin Rouge 글자를 세 줄에 반복해 넣으면서 첫 글자인 M을 크게 강조한 글자 도안이며, 뒤쪽의 관객들을 실루엣으로 처리해 가운데 주인공을 돋보이게 한 그래픽 기법 등 전혀 새로운 포스터를 등장시켰다. 그 밑에 공연자의 이름이나 예명을 적었는데 라 굴뤼(‘먹보’라는 뜻의 별명)라는 무용수는 캉캉 춤을 추는 이 포스터의 캐릭터 덕분에 일약 스타로 떠오른다. 포스터가 파리 시내 곳곳에 나붙자 시민들이 서로 떼어가려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부터 물랭루즈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현대 그래픽 아트의 선구자이기도 했던 로트렉은 짧은 생애 동안 31점의 아름다운 포스터를 남겼다.
<천박해!, 진짜 천박해!Un Rude, Un Vrai Rude>라는 제목의 그림은 로트렉의 풍자 면모를 과감하게 보여준다. 최상위층인 자신의 아버지가 다른 귀족들과 어울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그림이다. 아들의 장애를 외면하고 고고한 척하는 아버지의 기품이란 것이 하층민과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야유일 것이다. 
1899년, 로트렉은 알콜 중독으로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환각 증세를 보이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쇄골이 부러진 채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3개월 정도 수용되어 있던 정신병원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는 연필과 기억만으로 10년 전에 보았던 서커스에서 경마하는 장면을 세밀하게 그려 의료진에게 보여주고 회복을 인정받아 겨우 퇴원할 수 있었다. 이때 “나는 내 드로잉으로 자유를 샀다I bought my freedom with my drawing.”고 말했다. 퇴원 후에도 작업을 계속했으나 1901년 몸의 마비 증상까지 겹쳐 어머니에게로 가게 된다. 드라마틱한 37세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들 곁을 지킨 어머니 아델의 품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어머니, 당신뿐입니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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