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재미마당

[영화 이야기] 홍유리 -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존 말코비치 되기>(1999), <어댑테이션>(2002), <이터널 선샤인>(2004)의 각본, <시네도키, 뉴욕>(2007) <아노말리사>(2015)의 각본 및 감독 등 인간 내면 탐구에 집중해온 찰리 카우프만이 이번에는 이안 미드의 동명 소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를 영화화했다. 이 영화는 전작들의 연장선상에서 지금까지의 그 어떤 영화들보다 더욱 그 극단으로 치닫는다. 영화의 메인 플롯과 결합된 스토리는 표면적으로 단순하지만 기이하다. 제이크와 여자 친구는 시골에 사는 제이크의 부모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여자 친구는 가는 내내 제이크와의 이별을 고민하지만 말을 꺼내지 못하고 갈등한다. 제이크의 집에 도착해 부모를 만나는 동안 여자 친구는 제이크와 부모의 관계를 다양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경함하게 된다. 논문을 마쳐야 하는 여자 친구는 늦어지는 밤과 눈보라를 걱정하여 귀환을 재촉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이크의 고집으로 어느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그들은 서로를 잃고 사라진다. 영화는 잠시 잠깐씩 등장하던 고등학교 청소부 노인의 죽음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위의 요약에는 노인이 연관된 서브플롯에 대한 언급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아울러 ‘다양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경험’과 같은 많은 장면들이 부연 설명을 요한다. 더욱이 주인공들이 왜 사라지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노인의 등장과 죽음을 보여주는지 주제를 암시하는 결론에 대한 해석이 절실해진다. 흥미로운 점은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소개하면서 ‘공포영화’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귀신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살인마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좀비가 등장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느 것 하나 공포영화의 장르적 공식에 부합되는 요소가 없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실로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너무나 난해한 장면 장면의 의미들과 그 의미들의 결합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한 궁금증, 동시에 관객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연유에 대한 궁금증이 이제 그만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끝낼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몬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이런 생각은 한 번 찾아오면 내 머리를 계속 지배한다. 어쩔 도리가 없다. 그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다. [...]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끝이란 항상 이런 것인지도. 제이크는 말했다. 때로는 생각이 행동보다 진실과 현실에 가까워. 말과 행동은 속여도 생각은 그럴 수 없거든.”

 

 

제목,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여자 친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 영화의 첫 대사다. 구어체로 번역된 제목은 연인관계의 이별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원제, ‘i'm thinking of end things’는 ‘나는 지금 끝내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로 직역된다. 여기서는 결말, 끝맺음에 대한 좀 더 포괄적 암시가 제시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i', 끝을 내고자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아마도 그 말을 직접적으로 읊으며 영화의 포문을 열고 있는 여자 친구일 것이다. 그러나 여자 친구의 정체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수상하다. 그의 이름과 직업이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이다. 처음엔 루시, 그 다음엔 루시아, 그리고 이본 등 나중에는 그에게 이름이 의미가 있는지 조차 모호해진다. 직업도 마찬가지이다. 물리학도, 시인, 화가, 심리학도 등 사회적 정체성이 이유 없이 바뀌어 간다. 이러한 상황은 여자 친구가 스스로 신분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변화와 주위의 규정에 의해 자연스럽게 적용된다. 여자 친구 역시 이러한 흐름에 흡수되어 제시된 정체성으로 스스로를 받아들인다. 'i'라는 위상을 부여받기에는 불안정한 인물이다.

반면 남자 친구인 제이크의 위치는 비교적 고정되어 있다. 여자 친구의 시점으로 비춰지지만 여자 친구의 유동적 정체성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일관된 상태로 그려진다. (그는 엔딩 크레딧에 이름이 제시된 유일한 인물이다. 여자 친구는 young woman, 노인은 janitor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대화와 내레이션을 통해 직업, 성격, 취미 등이 설명되는 여자 친구와는 달리 제이크의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는 언급되는 바가 전무하다. 제이크의 특징들은 부모의 집에 도착하면서 간접적 방식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부모의 모습은 한 순간에는 장년, 한 순간에는 노인, 한 순간에는 젊은 부부로 변한다. 억압적인 장년의 부모, 늘 싸우기만 하던 젊은 부모, 질병으로 쇠약해져 짐이 되어버린 노년의 부모. 이러한 가정환경을 통해 평소에는 어눌하고 수더분한 제이크가 급작스럽게 분노를 표출하던 이유를 유추하게 한다. 이 모든 상황은 여자 친구의 시점으로 그려지는데 그는 여전히 제이크의 속마음을 읽어내지는 못한다. 제이크는 수수께끼의 대상이 되면서 영화 시선의 중심에 놓인다.

집으로 돌아가는 후반부에는 앞서 전개되던 서브 플롯이 메인 플롯의 위치로 올라선다. 주인공인 줄 알았던 여자 친구와 제이크가 사라지고 후반부의 중심인물은 고등학교 청소부인 늙은 남성으로 대체된다. 따라서 여자 친구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제이크는 어떤 존재인지, 그들은 왜 사라지게 되었는지 이야기의 전체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다시 앞으로 돌아가 노인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제이크 및 여자 친구와 어떤 관계도 없으며 그들의 내러티브에 개입되지 않는다. 단지 연인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들에게 닥치는 기이하고 돌출된 상황들에서 사후적으로 노인과의 연결고리를 찾게 된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로 시작하는 여자 친구의 오프닝 내레이션은 어딘지 모를 오래된 집의 벽지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그의 내레이션이 흐르는 동안 창가에서 밖을 내려다보는 노인의 모습이 급작스럽게 삽입된다. 길거리에서 제이크를 기다리는 여자 친구의 모습으로 돌아간 후 다시 벽지, 창문의 커튼, 재봉틀, 계단, 현관, 휠체어, 마루바닥, 개껌, 액자, 계단, 지붕, 그네, 창문의 구멍 난 모기장 등의 파편화된 이미지가 흘러간다. (벽지를 비롯한 이 이미지들은 제이크 부모의 집에서 다시 등장한다.) 노인의 뒷모습이 나올 때, 그의 목소리로 가정되는 희미한 독백이 기습적으로 등장한다. “그 가정은 옳다. 내 두려움은 커진다. 이제 대답할 시간이다. 질문은 단 하나. 대답할 질문은 하나.” 여자 친구는 거리에서 제이크와의 관계를 되뇌다 불현듯 건물의 창문을 바라보며 “나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 느낌은 강하다”고 말한다. 여자 친구는 핸드폰이 울릴 때 마다 돋보기로 보이는 안경을 꺼내 쓴다. 그의 시력은 분명 가까운 것이 보이지 않는 원시이다. 젊은 여성을 노안으로 설정한 것은 ‘연결되어 있다’라는 대사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여자친구와 제이크의 관계에서도 수상쩍은 상황이 드러난다. 여자 친구가 차안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의 내레이션을 읊을 때마다 제이크가 그 생각의 흐름을 끊는다. 특히 이별을 결심하는 대사가 등장하는 순간 마치 그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처럼 제이크는 화제를 바꾸듯 급히 질문을 던진다. 이 상황은 반복적으로 전개됨으로써 둘 간의 심적 연관관계를 암시한다. 여자 친구와 제이크의 관계에서 기이한 점은 부모의 집에서도 스치듯 등장한다. 제이크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본 여자 친구는 몹시 놀라며 “저건 나잖아!”라고 외친다. 그러나 사진 속 아이는 분명 제이크와 닮은 남자 아이이다. 나아가 제이크와 여자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알게 된 여자 친구의 정체성, 즉 물리학도, 시인, 화가, 심리학도 등의 특징이 제이크 부모의 집에 가득 쌓여 있는 책, 그림 등의 제목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자 친구는 제이크의 머릿속 인물인 셈이다.

이쯤 되면 여자 친구는 노인이며 동시에 제이크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노인과 제이크는 어떤 관계인가. 제이크의 집에는 그가 두려워하는 지하실이 있다. 지하실로 연결되는 문은 짐승이 할퀸 상처로 가득하다. 제이크는 기르던 강아지가 아파 지하실에 가두어 두었다고만 둘러대지만 지하실을 두려워하는 내색이 역력하다. (여자 친구가 현재 쓰고 있는 논문의 제목은 공교롭게도 <감각 후근 신경절 뉴런의 광견병 감염 감수성>이다.) 여자 친구는 물기를 털고 있는 강아지를 기시감처럼 두어 차례 반복적으로 보게 된다. 우연히 지하실로 들어간 그는 세탁기 옆 빨랫감에서 제이크의 이름이 새겨진 청소부 유니폼을 발견한다. 가장 결정적인 힌트는 고등학교에서 등장한다. 쓰레기만 버리고 오겠다던 제이크가 돌아오지 않자 여자 친구는 학교로 들어가 제이크를 찾는다. 청소를 하던 노인은 여자 친구에게 눈에 젖은 신발 대신 슬리퍼를 신어달라고, 제이크가 앞서 권했던 똑 같은 모양의 슬리퍼를 건낸다. 여자 친구는 노인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왜 여기 있고 누구를 찾고 있는지를 잊어버리게 되고 노인을 깊이 안아 준 후 사라진다. 이후 노인은 자신의 트럭 안에서 머릿속을 헤집는 생각들에 잠식된다. 제이크가 여자 친구에게 들려주었던, 주인이 돌보지 않아 산채로 구더기에게 파먹혀 죽어가던 돼지가 차 창 밖 눈보라 속에 등장한다. 노인은 전신을 벌거벗은 채 돼지를 따라 학교로 들어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눈보라가 그친 쾌청한 파란 하늘과 눈 속에 파묻혀 있는 노인의 트럭으로 끝을 맺는다.

 

 

결국 여자 친구도, 제이크도, 노인도 같은 인물이지만 노인만이 현실에 존재한다. 물리학도이자 시인, 화가이면서 심리학도인 여자 친구는 제이크의 방안에서 좀먹고 있는 책들과 그림처럼 제이크의 지적 욕망을 형상화하는 존재이다. 젊은 제이크는 노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젊은 자신이다. 문제는 여자 친구도, 제이크도 자신이 노인임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 혹은 자각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노인의 의식은 처참하게 망가져 있다. 제이크가 지하실을 두려워한 것은 광견병에 걸려 지하실에서 갇힌 채 죽어간 강아지처럼 이루어지지 못한 욕망이 망상이 되어 자신의 기억을 잠식해버린 상황을 암시한다. 노인이 서브 플롯에 놓여 있던 것은 결국 현실의 피와 살로 이루어진 물리적 자신이 부서지고 망가진 기억보다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포감을 느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이크는 말했다. 때로는 생각이 행동보다 진실과 현실에 가까워. 말과 행동은 속여도 생각은 그럴 수 없거든” 여자 친구의 초반 내레이션은 이 영화가 바라보는 인간의 존엄이 ‘생각’에 있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생각이 더 이상 자아를 규정하는데 실패하고 극심하게 파편화된다면 스스로를 현실의 좌표 속에 위치시키고 통제 하는 게 불가능해질 것이다. 제목의 'i'가 소문자인 것은 생각의 주체가 자신의 생각을 통합할 수 없는 불완전한 상태, 죽은 채 살아있는 무의미한 상태를 가리킨다. 현실 속에서 노인이 반복적으로 되새기는 것은 “그 가정은 옳다. 내 두려움은 커진다. 이제 대답할 시간이다. 질문은 단 하나. 대답할 질문은 하나.”라는 어구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여자 친구의 입에서 등장한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영화 전반에 걸친 에피소드들, 파편화된 기억과 환상의 지속은 죽음을 지연시키고자 하는, 삶에 대한 중력 같은 생존 본능에서 기인할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 필연적임을 아는 동물은 인간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동물들은 현재를 산다. 인간은 그럴 수 없기에 희망을 발명했다. [...] 알면서도 지속하는 게 인간인지 모른다. 그 대안은 너무 많은 에너지와 결단을 요구하니까.” 결국 영화는 욕망이 망상이 되고 그 망상에 자아가 잠식된 인간의 모습과 그러한 인간에게 주어진 종착역은 결국 죽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카우프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 언급되는 유명한 작품 속 인물, 실제의 시인, 화가 대부분이 비참한 현실 속에 고통 받다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다. 특히 여자 친구가 차안에서 자신이 쓴 시라고 읊었던 (실제 시인 에바 H. D.의) <본도그>는 카우프만이 갖고 있는 염세적 관점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낸다.

 

 

“집에 오는 건 끔찍하다. 개가 얼굴을 핥든 말든, 아내가 있든 아내 형상의 외로움만 기다리고 있든, 집에 오는 건 끔찍하게 외롭다. 그렇기에 조금 전까지 머문 곳의 억압적인 기압을 애틋한 마음으로 떠올린다. 집에 오면 모든 게 더 나빠지니까. [...] 그래, 어쨌든 넌 돌아왔다. 해는 지친 창녀처럼 오르락내리락하고 날씨는 부러진 사지처럼 미동이 없는데 넌 계속해서 늙어가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지만 네 몸속 소금의 조수만 움직인다. 네 시야는 흐리다. 넌 네 날씨를 지니고 다닌다. 커다란 대왕고래, 골격의 어둠. 넌 돌아온다. 투시력을 가지고. 네 눈은 갈망이 되었다. 넌 돌연변이 선물을 들고 집으로 온다. 뼈의 집으로. 지금 네가 보는 건, 전부, 뼈.”

 

여자 친구는 “투시력을 가지고”라 말하며 카메라를 응시한다. 이 불행한 싯구를 훔쳐듣던 관객들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다. 디에게시스 안의 인물이 스크린이라는 매체를 거치지 않고 관객에게 직접 다가오기 때문이다. 제이크가 칭찬의 탄성을 지를 때까지 여자 친구는 관객을 뚫어져라 본다. 관객은 여자 친구의 시선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현실과 망상의 경계가 모호해졌음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또한 디에게시스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당신의 머릿속은 온전한가요? 망상에 잠식된, 죽음과도 같은 고립감을 당신은 겪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는 어떤 희망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 길의 끝에 놓인 필연적 죽음을 시사한다. 이 모든 끔찍한 현실이 허구의 세계 안에 안전하게 갇혀 마무리되지 않고 여자 친구의 ‘말걸기’를 통해 관객의 현실로 침투한다. 그러니 이 영화는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첨언하자면, 넷플릭스 제작 드라마 <블라이 저택의 유령>(2020)은 <이제 그만 끝낼까 해>와 정확히 같은 포인트를 공포의 핵심으로 다룬다. 극중 인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은 죽음도, 빙의도, 유령도 아닌 기억의 파편에 잠식되는 것이다. 인물들은 고통스러운 현실로 인해 기억으로 스스로를 잠행시키고 점차 현실과 기억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이 상황이 반복될수록 기억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결국 이미 죽어버린 존재들조차 두려워하는, 의식이 사라져버린 영겁의 유령이 된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이 두 이야기는 모두 인간의 존엄을 규정짓는 것에 기억을 둔다.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공포서사의 영역에서 논의되는 것은 동시대의 우리에게 놓인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가 온전한 생각 속에 스스로를 세우고 살아가지 못할 것에 대한 불안감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에서 여자 친구의 말걸기는 우리의 내제된 공포를 정조준한다. 그리고 영화 내내 내리던 눈이 노인의 죽음 후 그침으로써 죽음만이 이와 같은 갈등과 혼돈을 끝낼 수 있다는 카우프만의 비관적 세계관을 현실로 관통시킨다. 이 영화는 어떤 공포영화보다 더 잔인하다.

 

 

 

홍유리 | 서강대학교 영상학 박사, University of Bristol, Film and Television production 석사,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석/학사. 박사학위논문 <다큐멘터리 영화의 수행적 실천 양상과 의미에 관한 연구-트라우마적 경험의 표현 방식을 중심으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