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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마당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 이토록 아름다운 낮은 자 권정생

Editor 박미경

 

가수 나훈아가 노래했다.

테스형 천국은 있던가요. 소크라테스형 먼저 가 본 그곳은 어떤가요.“

미세 먼지의 공포로 하늘을 올려보지 못한 채 살다가 코로나 19 덕분으로 투명해진 푸른 빛 가을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훈아 투로 묻고 싶어지는 한 사람이 떠오른다.

권정생 선생님, 천국은 있던가요.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은 옳던가요.“

병마와 가난과 고독으로 점철되었던 삶을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살았던 혹독했던 지상의 삶을 털고 하늘로 떠난지 13. 그곳에서 행복하실까 궁금해진다. 글과 인격, 삶과 사상. 그리고 유언까지 일치한 거의 유일한 사람, 권정생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이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신부 봉화군 영호군 비내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만한 사람이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 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하는 애쓰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 세 번 쯤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번도 못했다.
세 사람은 내가 쓴 저작물을 잘 관리해 주기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가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온 인세는 마땅히 어린이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 할 것이다.

 

누가 이렇게 유머와 진실을 담아 아프고도 낭만적인 유언을 남길 수 있을까. 81몽실 언니등 베스트셀러를 쓰면서 수 억 원에 이르는 인세를 받았으나, 정작 산골의 흙집에서 평생을 검약하게 살았고, 옷도 단벌이어서, 이웃 사람들은 그가 몹시 가난한 줄 알고 있었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수 많은 사람들을 보고., 그가 남긴 재산이 알려지자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는 아동문학가를 넘어선 평화주의자, 생태주의자, 아니키스트, 사상가며 마침내 성자였다.

 

동화가 왜 그렇게 어둡냐고요? 그게 진실이기에 아이들에게 감추는 것만이 대수는 아니지요. 좋은 글은 읽고 나면 불편한 느낌이 드는 글입니다.“

권정생의 동화에는 왕자와 공주가 살지 않았다. 천사와 요정도 없고 행복한 아이들도 등장하지 않았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환상만으로 쓰여진 동화의 세계를 뒤집어 버린 강아지 똥이후로 권정생 선생은 아동문학이 외면했던 고난 속의 동심을 그려나갔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비록 어둡고 추운 곳이지만 그곳에도 왕자나 공주 못지 않게 따뜻한 영혼을 간직한 수 많은 존재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강아지의 똥이 노란 민들레꽃으로 다시 살아나듯.

 

 

권정생은 1937년 도쿄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거리의 청소부로,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형제들은 공장으로 일하러 나가면 늘 외톨이로 골목에서 지내던 어린 정생은 그 빈민가의 비극적이고 혹독한 가난을 경험하고 바라보면서 성장했다. 그 시절에 만났던 인물들을 <몽실언니>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 문학으로 형상화 한 것은 운명이지 싶다. 특히 청소부 였던 아버지가 쓰레기 더미에서 골라낸 책들을 보며 홀로 글자를 익히고 찢어진 그림책이나 동화책속에서 비참한 현실을 떠나 아름답고 행복한 환상의 세계로 날아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해방을 맞은 이듬해 두 형을 제외한 가족이 귀국했으나 너무 가난해서 서로 흩어져 살아야 했다. 급기야 열아홉에 폐결핵에 걸렸지만 보건소에서 나오는 항생제 공급마저도 쉽지 않아 같이 폐결핵에 걸린 친구들이 하나 둘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의 병세는 점점 심해져서 폐결핵과 늑막염을 거쳐 신장결핵과 방광결핵으로 전신 결핵이 되어갔다.

어머니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나름대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뒤꼍 뽕나무 아래서 밤마다 몰래 나가 기도하시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산과 들로 나가서 약초를 캐오시고 메뚜기를 잡아 오셨다. 뱀도, 개구리도 잡아오셨다. 아마 어머니가 잡아 오신 개구리가 수천 마리가 넘을 것이다. 벌레 한 마리 죽이는 것도 못 마땅히 여기고, 생명 가진 것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어머니가 그 많은 개구리를 어떻게 잡아 껍질을 벗기셨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가엾으시다.’ 그의 자전적 산문 <오물처럼 딩굴면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아들의 병구완을 위한 어머니의 몸부림이 느껴진다. 그 정성 때문인지 죽기만을 기다리던 그의 병세가 얼마간 회복되었지만 1년이 채 안돼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해야 했고 또 다시 아버지와 형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떠돌며 인생의 밑바닥에서 걸식을 하다가 부고환 결핵 까지 얻은 그는 1967년 서른의 나이로 경북 안동의 일직교회 부속의 문간방에서 기거하며 종지기를 하게 된다.

그가 예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다섯 살 때 누나들이 예수의 죽음에 관해 주고 받는 얘기를 듣고서 였다. 십자가에 피를 흘리며 죽어간 예수의 형상이 평생 그의 머리에 박힌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터다.

그는 교회 문간방에 살면서 새벽종을 울리던 때가 진짜 하느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겨울에 성에가 끼고 얼어버린 종 줄에 손이 시려도 단 한번도 장갑을 끼지 않고 새벽종을 울리던 사람이다. ‘새벽 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가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가 있는가가 그 이유였다. 몸무게 사십 킬로를 넘어보지 못한 허약한 몸으로 종 줄을 잡아당길 때마다 기도한 것은 늘 고달프고 아픈 이웃들에 대한 바람이었다.

여름이면 소나기에 뚫린 창호지 문 구멍 사이로 개구리가 들어와 울고,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

 

민들레꽃과 강아지똥이 운명처럼 가슴에 심어졌던 1969년은 그의 삶에 작은 빛이 들어오는 해다. 월간 기독교교육1회 기독교 아동문학 현상모집에서 <강아지 똥>이 당선되었다. 상금 1만 원을 받아서 쌀을 한 말 사고, 새끼 염소 한 쌍을 사서 길렀다.

1971년 대구매일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입선되었다. 상금은 2만원 이었다. 시상식이 끝나면 심사위원들과 술자리에서 상금을 날리기 십상이었던 관행을 아는 김성도 심사위원이 서둘러 그를 돌려보낸 일화도 있다.

 

‘19721228, 나는 감기가 덮쳐 아침도 먹지 못한 채 누워있었다. 전날 눈이 내렸고, 그날도 잔뜩 흐린 날씨가 몹시 추웠다. 집배원이 문을 벌컥 열면서 아저씨, 전보 왔니더하면서 종이쪽지를 던져줬다. 결핵 환자에게는 어떤 것이든 흥분은 금물이다. 그런데도 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흥분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날 밤 심한 각혈을 했다.’ <빌뱅이 언덕>(창비)

 

그 날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다고 통보받은 날이다. 1974년 첫 동화집 <강아지 똥>이 세상에 나왔다. 이듬해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1982년부터 월간 새가정에 장편동화 <몽실 언니>5년간 연재했다. <몽실 언니>는 청소년 권장도서가 되었고, TV 드라마로 방영되었으며,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기도 했고, 50만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조탑동 빌뱅이 언덕 작은 오두막집에서 평생을 검약하게 살았다. 1995년 새싹회 새싹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을 때 우리 아동문학이 과연 어린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기에 이런 상을 주고받습니까?”라면서 수상을 거부했다.

권정생의 동화는 그의 생애가 그러하듯 불행하고 슬프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아동 문학의 경계를 넘어서는 깊이로 어른들에게도 감동을 주지만 특히 그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 <죽을 먹어도>(아리랑 나라) <빌뱅이 언덕>(창비)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무섭도록 명쾌하며 뜨겁다. 죽비로 내려친 듯 정신이 번쩍 든다. 그의 사상이 이론과 학식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가난과 병고를 안고도 자연과 약자를 대변하며 살아온 삶 속에서 빚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체계인 자본주의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무욕, 절제, 가난을 무기로 정면 대결했다. 환경 문제, 경제성장으로 무너지는 자연과, 경쟁으로만 치닫는 교육, 분단과 통일에 대한 염려와 경고, 특히 본인이 속한 기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고언은 숙연함마저 갖게 했다.

 

‘-물질만능과 출세 지향적 기독교는 우리 사회에 어떤 빛으로 도움이 되었던가. 밤이면 빨갛게 높이 빛나는 십자가가 정말 교회의 빛인가.
-기독교가 있든 없든 교회가 있든 없든, 하느님은 헤일 수 없는 아득한 세월 동안 우주를 다스려 왔다.
-종교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려는 것이지, 종교가 요구하는 대로 하느님의 섭리를 바꾸는 게 아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바로 자연의 섭리가 된다. 하느님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분이 아이라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 했다. 그러니 하느님은 곧 자연인 것이다.’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

 

 

이러한 그의 사상은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신이란 절대적으로 무한한 속성들로 이루어진 실체,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 결정된 자연을 떠올리게도 한다.

 

깨끗하고 편리하게 산다는 도시인들은 먼지와 오물을 묻히며 살아가는 청소부나 농촌 사람들을 업신여긴다. 하지만 정작 깨끗하게 차리고 다니는 사람일수록 그만큼 더러운 오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양말 한짝도 알뜰히 기워 신는 사람은 쓰레기를 그만큼 줄인다. 오물을 만지며 사는 청소부의 몸은 더럽지만 세상은 그 손으로 인해 깨끗해진다.’ - <죽을 먹어도>(아리랑 나라)

 

2007년 그는 끝내 결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71세를 일기로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로 떠났다. 죽기 2년 전 미리 쓴 유언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에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아직도 하늘나라에서 환생을 고민하고 있을까. 아니다. 여전히 권력과 욕망으로 달리는 이 세상에 환생하기에 당신은 지나치게 순결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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