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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0년 겨울호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수필마당] 김숙경 - 직진이 아닌 좌회전

 

 

직진이 아닌 좌회전

 

 

 

봄날 분주함을 보태는 일이 생겼다. 가게 임대 만기에 맞춰 월 40프로 인상된 점포에서 굳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 이전해야 했다. 추운 날씨를 감안해 봄 까지 연장해 주겠다는 임대인의 선심보다 먼저 봄이 급속도로 가까운 곳에 와 있다. 봄이 오려면 아직은 한참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발등에 꽃 같은 불이 붙었다.

가진 자의 횡포라고 생각하면 그뿐이겠지만 그들도 나름 사정이 있을 거라는 이유도 헤아려본다. 없는 자의 서러움이 깊으면 지금보다 더 값싼 곳을 얻어 나가면 된다. 감당 안 되면 우리처럼 떠날 수밖에 없는 일 어쩌랴. 이제 자리 잡고 안정됐나 싶은데 턱없는 임대료 인상에 주인과 대판 싸웠다는 옆 가게 칼국수집, 울며 겨자 먹기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디시마트, 신발가게, 세탁소도는 우리처럼 그렇게 박차고 떠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새 힘없는 사람들의 서러움처럼 꽃이 진다.

내일이면 날마다 보았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는 섭섭한 봄이다. 생활의 패턴이 바뀌었다. 가게 가는 길 십년 넘도록 익숙하게 운전하던 길들이 직선이 아닌 좌회전이 되기도 하고 이젠 낯선 길이 되어 유턴할 때도 있다. 도로위에서 자주 혼돈을 겪는다. 어떻게 하면 찾아가는 그 길이 익숙해질까 당분간은 조심스러운 일이 될 것 같다.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뇌가 한 방향으로 지시한 일처럼 그곳도 길을 내며 찾아가다 보면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단순한 통로가 되리라. 아침마다 좌선하듯 눈을 감고 방향감각을 깨우고 있다.

새로운 곳에서 시작하는 일이 기존 하는 일의 연장이지만 거품 많았던 생활경제가 차분해 지기를 바라는 출발이라 생각한다. 한차례씩 찾아와 할퀴는 폭군 같은 일들, 무엇을 할 수 없다는 자신감이 결여될 때마다 주저앉게 하던 일들, 무릎을 짚고라도 일어나려 하지만 늙음도 한 몫을 하던 주저함들, 갈수록 세상은 녹록하지 않다. 웃고 있는 사람들 속에 어느 때는 나만 고단한 삶을 사는가 위축이 되기도 한다. 어쩐지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대가가 너무 초라한 듯 보인다.

비가 내린다. 곡우다.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풍년을 약속하는 비라고 한다. 빗소리 듣고 쑥쑥 자랄 꽃과 나무 그리고 깊어질 숲들처럼 내가 추구하는 일들도 그렇게 자라기를 바라는 적막한 밤이다. 의도치 않은 삶의 방향에 애써 적응하는 중이다. 직진이 아닌 좌회전이라도 좋다. 잠시만 헤매다 제자리로 돌아와 시동을 안전하게 끄고 싶다.

 

 

 

 

 

김숙경 | 2006년 『한국문인』 수필 등단. 수필집 『엄마의 바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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