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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0년 겨울호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수필마당] 곽영호 - 두부 한 모 사오세요

 

 

두부 한 모 사오세요

 

 

지는 해도 피곤한가보다. 게으름뱅이 하품하듯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모두가 하루를 내려놓으려는 듯 몸을 눕힌다. 내 그림자도 늘어져 휘청거린다. 흐느적거리는 것은 깔끔한 모습이 아니다. 하루를 마감하는 그림자를 기다랗게 느려 치렁거리는 것은 온전하게 마무리를 하지 못한 미완의 모습이다. 찜찜한 기분으로 터덜거릴 때 전화벨이 울린다. 나의 동선을 꿰뚫고 있는 아내다. “두부 한 모 사오세요. 나 두부 살줄 모르는데. 두부 못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부침 할 거라고 하면 알아서 줘.” 일갈한다. 농부가 갈아엎어 놓은 흙속에서 굼벵이 제집 찾아가듯 두부 집을 더듬는다.

저녁시장거리에는 여인들 발걸음이 줄을 잇는다. 광고문구가 선명한 바퀴달린 가방을 모두가 끌고 다닌다. 어쩌다가 저녁 찬거리를 사러 다니는 주부가 되었나 싶어 기분이 마땅찮다. 저녁노을처럼 기운마저 뉘엿하여 발걸음이 질질 끌린다. 가장의 존엄이 땅에 떨어져 지는 해를 닮아간다. 사람은 늙어 갈수록 후덕하게 익어간다는데 아내는 꼬부라질수록 가시가 돋아 억새지고 잔소리가 9단이다. 도무지 이겨낼 수가 없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사내대장부한테 그런 일을 시키느냐고 혼 줄이 났을 텐데. 어느 세상에 가 계신 줄도 모르는 어머니를 부를 수도 없고. 세상이 변했으니 어쩌겠나.

기웃기웃 염탐하듯 두부 한 모를 샀다. 하얀 비닐에 담아 준다. 시키는 대로 심부름을 잘 한 것 같아 마음이 저녁바람처럼 서늘하다. 디룽디룽 들고 가는 내 모양새가 눈에 힐긋 보인다. 이건 아니지 싶다. 더욱 문제는 두부모가 뭉그러지면 또 한 소리 들을까봐 걱정이다. 뿐만 아니라 시장 여인들 모두가 나만 쳐다보는 것 같다. 다시 돌아가 검은 비닐봉지를 얻어 담는다. 그래도 의심쩍어 이번에는 손에 올려 들고 간다. 야들야들한 촉감이 온기가 따끈해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내도 젊을 때는 두부처럼 나긋나긋 따뜻했었는데 사람이 많이 변했다. 구진 세월에 시달려 온 탓이겠지, 본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짭조름한 양념간장이 얹어진 두부부침이 고소해 저녁밥을 달달하게 먹는다.

부른 배를 통통 두드려 본다. 누구 덕일까. 두부 사온 내 덕이지. 그윽하게 만족을 하는데 느닷없이 아내의 눈빛이 싸늘하게 지나간다. 여보시오. 부침하여 맛나게 양념한 수고는 어쩌고. 두부 사오고 야들야들하게 맛을 낸 것은 우리 둘의 합작으로 이룬 것이다. 다음 날이다. 먹다 남은 두부부침이 딱딱하게 굳었다. 세월에 장사 없다고 말랑하던 두부도 제 모습을 잃었다. 늙어가는 우리도 두부처럼 굳어질까봐 먹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두부를 반모만 사와야겠다. 빈대주름만큼 남은 우리의 정도 두부처럼 굳어버리면 안 되잖아.

저녁밥 잘 먹은 배를 통통 두들겨 본다. 누구 덕일까. 두부 사온 내 덕이지 하는데 느닷없이 바람이 휙 지나간다. “이 사람아, 간수 덕이야.” 맞다, 이 맛은 간수 덕이다. 간수 아니면 이 맛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 흐물흐물 거리는 콩물을 야들야들하게 두부로 만들어 낸 것은 간수의 창조물이다. 소금은 우리의 음식에 간을 맞추지만 간수는 두부라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우리 입맛을 새로이 변화시킨다. 간수가 만든 두부는 동양 사람들이 최고로 치는 음식이다.

 

 

 

 

 

곽영호 |2007년 계간 『문파』 등단. 수필집 『나팔꽃 부부젤라』. 농어촌문학상 수상, 수원시 문화예술지원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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