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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0년 겨울호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수필마당] 심웅석 - 안개

 

 

안개

 

 

입춘이 지나면서 앞산에 안개 끼는 날이 많아졌다. 침대에서 일어나 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산자락을 보면 신비스럽고 푸근하다. 우리 인간들의 복잡한 속내를 모두 덮어버리는 모습이다. 최선의 선(善)을 놓고 경쟁하는 아름다운 다툼이 아니라, 나의 주의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상대를 괴멸시키려는, 인간들의 허물을 인자하게 덮어주려는 신의 손길 같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걷고 희뿌연 안개를 바라보면, 살면서 느꼈던 그에 대한 기억들이 마구 달려온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는, 이른 아침에 앞치마에 손 씻으며 웃고 나오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얼굴이 안개 속에서 나타나곤 했다. 새벽하늘에 별들이 돌아갈 무렵, 안개가 걷히면서 논둑 위에 송아지가 ‘음매-애’하고 어미 찾아 울 때면 고향마을은 한없이 평화스러웠다. 6.25로 금강다리가 끊어져 배로 강을 건너 등교할 때, 안개 속에서 사공이 노 저으며 나타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걸어서 학교 갈 때 산등성이에 늑대 떼가 안개 속에 나타나곤 했었다. 개를 보는 듯 무섭지 않았던 것은 안개가 다정하게 감싸주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젊을 때에는 가족과 함께 여기저기 차를 몰고 다니면서 하루 이틀씩 자고 다니던 여행이 많았다. 한계령의 산속 모텔에서 자던 날 아침에, 숙소 밑으로 온 산이 짙은 안개로 희뿌옇게 덮였을 때의 감동적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태백산맥의 높은 산 준령들을 장엄하게 안개로 덮은 모습이 마치 선녀와 나무꾼이 만나는 신비스런 전설인 듯, 인간의 잡다한 흔적들이 모두 사라진 태초의 지구인 듯, 경외스러운 신의 영령(英靈)을 만나고 있었다. 이럴 때는 지금껏 잘못 살아온 일이 없는지 돌아보면서, 옷깃을 여미게 되는 연약한 인간이다. 이것이 神의 존재 이유인 지도 모른다.

윤동주 시인은 그의 詩 <안개>에서 ‘신의 옷자락인 양 추운 내 영혼을 감싸주는 것’이라고 그 포근함을 노래했다. <흐르는 거리>에서는 ‘안개 속에 잠긴 거리는, 가련한 많은 사람들을 싣고서 끝없이 흐른다’고 일제 강점기를 한탄했다. 안개를 어둠으로도 암시했고, 포근한 손길로도 표현한 것이다. 가수 현미는, 밤안개가 가득한 쓸쓸한 밤거리에서 임의 그림자를 찾아 헤맨다,(노래 밤안개)고 낭만적인 안개를 노래했다. 어저께 T.V에 나와 팔십이 훌쩍 넘은 연세에 반듯한 자세로, 넘치는 성량으로 노래 부르는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한강 언덕의 안개 낀 카페에 명랑하게 나타나던 기억이 새로웠다. 긍정적인 밝은 삶이 건강을 지켜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개도 사람에 따라 느끼는 형상이 이렇게 다르다. 용인 수지로 이사 온 후로는 전에 잘 다니던 단기 국내여행을 잘 다니지 않는다. 사는 동네가 산 밑이니 산을 좋아하는 내가 굳이 짐 싸서 떠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느지막이 일어나, 창밖에 조용히 내려앉은 안개가 공원을 덮고 멀리 산자락까지 이어지는 풍경을 보면서 행복한 기지개를 켠다. 수평선으로 멀어지는 푸른 바다를 보는 것처럼,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처럼, 아늑한 안개 속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심웅석 | 2016년 계간 『문파』 등단(시부문). 시집 『시집을 내다』 외. 수필집 『길 위에 길』 『친구를 찾아서』 외. 제13회 문파문학상 수상. 용인시 창작지원금 수혜. 한국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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