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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0년 겨울호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수필마당] 박현섭 - 접목

 

 

접목

 

 

올해처럼 숫자에 민감해 본 적이 없다.‘코로나바이러스전염병 확진자’라는 듣도 보도 못하던 숫자가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두더지 게임처럼 온 세상사람들 정신 줄을 쥐고 흔들어댄다. 하루하루 요동을 치는 숫자에 눈을 떼지 못한 채 가슴 조리는 불안이 목울대를 짓누르는 사이, 시간은 어이없이 반년을 훌쩍 넘겨 가을길목의 착잡한 일상으로 이어진다.

계절모퉁이를 돌아들며 숨죽이는 신음들이 안팎으로 낭자하다. 이런 나날이 계속되리라 아무도 예측할 수 없던 지난봄은 우리에게도 더없이 잔인한 날이었다. 제대로 드나들 수 없는 중환자실에 갖가지 기구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 맞닥뜨린 남편의 모습은 처참했다. 얼결에 지끈 감았던 눈을 뜨며 그에게 불쑥 튀어나온 말이 “고맙습니다”였다. 다른 어떤 말로는 눈을 맞출 수 없는 지경이었다.

살면서 수시로 부딪히는 의료진과의 대면은 왜 늘 두려운지. 남편의 심장혈관에 이상이 생겼으니 당장 새로운 통로를 이어야 한다는 의료진의 설명은 ‘당신 남편의 생사여탈권이 내게 있노라’는 으름장처럼 느껴졌다. 긴 시간 수술 끝에 새 길을 찾아 건강한 심장을 안고 돌아온 내 남자가 다시 뜰 안을 서성인다.

사람들은 보통 아프기 전까지, 자신은 건강에 이상 없다는 자신감으로 산다. 갑자기 병고에 시달리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는 자아를 찾는다. 자신의 행로가 마냥 평탄할 줄만 알던 사람이 문득 커다란 돌부리에 채일 줄 모르고 넘어졌던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 끈을 조이며 호되게 앓았노라 서서히 숨을 고르는 사이, 나는 실성한 여인네처럼 아무에게나 묻고 싶었다.

‘당신은 가슴팍에 구멍 하나쯤 뚫고 사나요/바늘 하나 들이밀 수 없이 꽉 막혀버린 내게/당신의 눈물 한 줌 따위 보이지 않습니다/설설 기어 다니느라 무릎에 핏방울이 배어난다 울어도/위로의 말 한 마디 건넬 수가 없네요/입을 꼭꼭 여미라고 사방에서 종 주먹을 대며 윽박지르니까요/그동안 너무 많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이 해버렸나 봐요/ 은둔과 감금의 차이가 무엇인지’

마스크가 일상이 된 채 현관을 나서면 작은 고욤나무를 만난다. 각기 다른 터전에서 자라 한 그루의 나무로 접목되어 감나무로 거듭나면 흔적만 남긴 채 잘려야 하는 게 고욤이다. 작년 가을에 심겨진 어린 나무가 처음 맞은 겨울이 혹독했나보다. 봄이 되니 눈발 한번 제대로 오지 않던 겨울 가뭄 속에서 추위를 이기지 못한 곁가지 감나무는 말라죽고, 고욤나무에 싹이 텄다. 앙증맞은 꽃이 피더니 열매가 여물어 어두운 자줏빛으로 농익어간다. 커다란 홍시를 기대하며 접목한 감나무 가지를 뚝 떼버리고 제 본모습인 고욤을 올망졸망 매다는 나름 결기를 보였지만, 제 어깨를 빌려 커다란 나무를 키워내는 역할을 놓친 것이다. 한 시간 거리 걷기 운동을 나서는 남편에게 내년 봄엔 다시 감나무를 접목해보자는 특별 주문을 해야겠다.

 

 

 

 

 

박현섭丨 2007년 계간 『문파』 등단. 수필집 『첫, 그리고 다시』. 경기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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