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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시인

[이 계절의 초대시인] 정끝별

 

 

★ 정끝별 시인의 신작시 ★

 

                                     갈매기의 꿈

 

 

                                                     To the real Jonathan Livingston Seagull, 
                                                                                     who lives within us all

하얀 새 한 마리가 긴 날개를 펴고 동쪽을 향해 날고 있었어
흰 날개를 받쳐주는 저 파랑은 바다였을까 하늘이었을까
오른쪽 날개에는 세로로 쓰는 갈매기의 꿈이
왼쪽 날개에는 가로로 쓰는 Jonathan Livingston Seagull a story가 펼쳐졌다가 판권에서 만났어

                  갈매기의 꿈      (값 500원)                                     

∼∼∼∼∼∼∼∼∼∼∼∼∼∼∼∼∼∼∼∼∼∼∼ 
西紀 1974年 4月 15日  印刷  

西紀 1974年 4月 25日  發行
著  者      리  처  드   바  크

譯  者      李      相       吉
발행인      方      義       煥
발행처      世      宗       閣
서울특별시 관악구 본동 127
출판등록 1962.11.3.(가)1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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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장 파본은 교환해 드림.
    

 

갈매기의 꿈과 영어를, 아버지가 말했어
갈매기의 꿈과 그림을, 여자에겐 날개가 없어
갈매기의 꿈과 베껴쓰기를, 오빠들이 말했어 
갈매기의 꿈과 춤을, 치마를 날개처럼 펼쳐선 안돼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가슴이 멍울지고 소름이 솜털처럼 돋던 이름이었다가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책장꼭대기에 먼지처럼 쌓인 이름이었다가
 
                                             시인은 마치 저 구름의 왕자 같아라

폭풍을 좇는 구름왕자처럼 파랑에 취해 좁쌀별들을 비웃는 한 시인의 알바트로스를 보았어
뱃사람들에게 잡혀 커다란 날개를 질질 끌고 다니다 물갈퀴는 쌈지로 뼈는 담뱃대로 깃털은 모자장식으로 팔렸다지 
파랑에서 빛나던 흰 날개를 떠올리는 밤에는 두통이 죽지까지 내려오곤 했어

모든 새들에겐 둥지가 있어야 해, 집이 말했어
먹이를 찾아 땅에 붙어 걷는 새들도 아름답지 않니? 거리가 말했어 

논에서 놀던 백로의 등에 올라타자 백로가 하얀 날개를 펼쳤는데 날개가 하늘을 덮어 궁창이 깨지며 천둥번개가 쳤어 붕새야 붕새,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깼는데
남편이 말했어, 좁은 침대에서 네가 날개를 펼치면 내가 떨어지잖아 아이들이 말했어, 우와 날개다! 타고 싶어 태워줘!
날으는 것이 두렵다는 소설을 읽고 또 읽으며 발 없는 새를 꿈꾸는 밤이었어 

                                                                               翼殷不逝라니, 
                                          큰 날개를 가지고도 날지를 못한다니! 

좁은 방에서 커다란 날개는 불구였을 거야
날기 전까지 나는 법을 몰라
백화점 옥상에서 떨어지면서 날기 시작했다지
한번 날자 죽어서도 세상 멀리 세상 높이 날았다지  
이상이라는 바보새를 애도하는 밤들이었어

낡은 침대에서 홀로 뒤척이던 날 보았어
반백년을 봉인된 채 꽂혀있던 갈매기의 꿈을
손끝에 잡힐락 말락 추락한 날개가 바닥을 치자   
시큼한 먼지들이 깃털처럼 날았어 일제히 
뼈에 구멍이 생기고 새처럼 가벼워진 몸이 휘청였어

                                           아침이었으며, 그리고…… 

/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조나단, 하면 두 날개가 
  다리보다 먼저 땅에 닿았어

          리빙스턴, 하면 물갈퀴들이
            허공을 막는 척력을 만들었어

                   시걸, 하면 천만근의 몸이  
                     절벽 끝으로 달려가곤 했어
 
       내 마음의 파랑에는 언제나 그 이름이 살고 있었어 

                     조나단, 하면서 폭풍에 
                   제 몸을 내던져 나는 새가

            리빙스턴, 하면서 한번 날아 
          죽어서도 파랑을 나는 새가

  시걸, 하면서 바람타고 날아
바람을 거슬러 나아가는 새가

 

 

 

 

정끝별 시인의 대표시

 

  내 숨은

쉼이나 빔에 머뭅니다

섬과 둠에 낸 한 짬의 보름이고

가끔과 어쩜에 낸 한 짬의 그믐입니다

 

그래야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내 맘은

뺨이나 품에 머뭅니다

님과 남과 놈에 깃든 한 뼘의 감금이고

요람과 바람과 범람에 깃든 한 뼘의 채움입니다

 

그래야 점이고 섬이고 움입니다

 

꿈만 같은 잠의

흠과 틈에 든 웃음이고

짐과 담과 금에서 멈춘 울음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두 입술이 맞부딪쳐 머금는 숨이

땀이고 힘이고 참이고

 

춤만 같은 삶의

몸부림이나 안간힘이라는 겁니다

 

-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문학동네, 2019.

 

/

은는이가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 『은는이가』, 문학동네, 2014.

 

/

 

밀물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 『흰 책』, 민음사, 2000.

 

 

 

정끝별 시인의 詩作 노트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얼마 전이었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학창시절 즐겨 읽었던 책이 뭐냐고. 나는 그때 일초의 고민도 없이 학창시절 삼종세트, 어린왕자 데미안 그리고 갈매기의 꿈을 말했다. 책들이 눈에 선연했다. 버리지 않았을 텐데...

책장 맨 꼭대기에 꽂혀 있었다. 스툴의자를 밟고 꺼내서 펼쳐본다. 새까만 먼지가 손에 묻어난다.

 

『어린 王子』, 安應烈 譯, 人文出版社, 1973, 값 600원.

『데미안』, 金耀燮 譯, 文藝出版社, 1971, 값 480원.

『갈매기의 꿈』, 李相吉 譯, 世宗閣, 1974, 값 500원.

 

아버지가 책 욕심이 많으셨던 데다 언니오빠들도 여럿이라책꽂이에는 늘 이런저런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아버지는 큰 방의 한 벽 전체에 손수 철제책꽂이를 만들어놓고 책 사들이는 걸 즐기셨다. 물론 자식들이 읽을 거라는 기대도 한몫을 했겠지만, 보기에도 무척 좋으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내 학창시절 삼종세트를 아버지가 구입하신 건지 언니오빠들이 구입한 건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냥 그 철제책꽂이에서 꺼내 읽고 내 방 책꽂이에 옮겨놓고는 읽고 또 읽다, 결혼하면서 그대로 챙겨온 열댓 권 중 삼종이다. 『어린 王子』와 『갈매기의 꿈』은 오른쪽으로는 한글번역이, 왼쪽으로는 원문이 시작되어 중간의 판권에서 끝이 났다. 원문은 가로쓰기, 한글번역은 세로쓰기다. 하드커버에 책케이스까지 갖춰져 있다. 공들인 장정과 편집체제, 표지, 인쇄 상태가 지금 봐도 간지난다. 『갈매기의 꿈』이 보관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삼종세트 곁에는 『異邦人』(1974. 金東寬 역, 新邱出版社, 값 500원), 하드커버표지를 분실한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 安東逸, 興文圖書, 1973, 값 420원), 하드커버표지도 책케이스도 없는 『나의 투쟁』(洪京鎬 編譯, 大運堂, 1975, 값 800원)도 있다. 모두 1971~1975년 사이, 그러니까 내가 8살~12살이던 때에 출간된 책들이다. 그러나 내가 이 책들을 읽었던 건 70년대 후반이나 80년대 초반인 중고등학생 즈음이었을 것이다.

이 책들은 모두 한글 세로쓰기다. 하드커버에 겉표지와 책케이스를 갖추었고 몇 권은 책끈도 있다. 생각해보니 그땐 금박까지 입힌 고급스런 장정의 책들을 거실 책장에 꽂아두는 게 유행이었다. 1970년에 새마을담배 한 갑이나 시내버스 요금이 10원, 소고기 한 근이 375원이었는데, 책 한 권 값이 한우 한 근 값을 훌쩍 넘는 걸 보면(지금 한우 한 근 값이면 문학책 두세 권은 너끈히 산다), 궁핍한 시대였음에도 책은 비쌌고 책의 가치는 장식품 그 이상이었다. 문학과 책의 아우라가 살아있던 시기였다.

 

먼지가 수북한 옛 책들을 뒤적이노라니, 새까매지는 손처럼 회억도 수다도 길어졌다. 어쨌든, 학창시절 내가 외우다시피 했던 삼종세트 중 한 권이 『갈매기의 꿈』이었고 나는 그 책을 가장 좋아했다. 그 책을 읽을 때마다 이상하게 몸과 마음이 시렸던 거 같다. 자유와 용기와 희망을 노래하는 그 책이 왜 내게는 슬픔으로 다가왔었는지 모른다. 책표지 때문이었을까. 새파란 바탕에 기다란 날개를 편 하얀 새 한 마리가 전부였는데, 비상하는 그 갈매기의 고독한 고단함이 시리게 전해지곤 했었다. 그 갈매기의 이름이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었다. 낯선 그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설렘으로 뭉클해지곤 했는데 설렘의 끝은 늘 날카롭게 짰다. 그랬다.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라는 그 이름에서는 서늘한 비릿내가 풍겼다. 어쨌든 ‘조나단’에서 낮고 깊은 착지를, ‘리빙스턴’에서 바른 지성의 세련된 발돋움을, 그리고 마지막 ‘시걸’에서 가볍게 비상하는 기분이 들곤 했던가.

그랬다.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그 이름을 부르면 나는 여기로부터 튀어 올라 허공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뼈마저 가볍게 비워서 허공의 바람을 견뎌낼 수 있을 수 있을 거 같았고, 높디높은 허공의 시선을 가질 수 있을 거 같았다.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을 되뇌노라면 나는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았고, 지금과 다른 나일 수 있을 거 같았고, 내가 알고 있는 나보다 더 나은 나일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랬다.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은 늘 내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며 스치는 이름이었다. 그렇게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이라는 이름에 한창 설렐 때, 내가 태어난 이후 내내 대통령이었던 바로 ‘그분’이 시바스 리갈을 마시다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날 이후 조나단 리빙스턴 시갈이라는 이름에서는 아버지가 마시곤 했던 시바스 리갈이라는 양주냄새가 섞여들곤 했다. 그 시바스 리갈은 진짜였을까? 그리고 나는, 빠르게 입시와 80년대의 대학생활로 진입했다. 대학원과 결혼과 육아와 취업 등이 연달아 놓여 있었다.

 

그랬다. 작년 어느 방송 인터뷰에서 학창시절 즐겨 읽었던 책을 물었고 봉인이 해제된 것처럼 내 안의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이 퍼덕이기 시작했다. 책꽂이 꼭대기에서 옛 책을 내려다놓고 뒤적이던 그날, 나는, 새에 관한 시 3편을 연달아 썼다. 열여섯 이후 사십년이 지나서야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을 다시 불러보았다. 누군가는 쉰에 바다를 보았다는데, 나는 쉰에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을 떠올리며 내 안의 파랑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흔에 왜 내 시에는 꽃이 등장하지 않았지 물었듯, 쉰에 다시 왜 내 시에는 새가 등장하지 않았는지를 물었다.

열여섯 내 꿈은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었다. 쉰여섯까지 나는, 그 이름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가지나 땅을 떠난 새가 그려지지 않았다. 하늘은 내게 ‘아이엠 그라운드’의 대상이 아니었다. 바다는 더더욱! 생각해보니, 대학시절 온몸이 붕 뜬 듯한 열기에 휩싸여 밤새 읽었던 책 중 하나가 에리카 종의 『날으는 것이 두렵다』(문학예술사, 1978년, 가격 3천원)였다. 여성도 자유와 욕망의 주체임을 선포하는 페미니즘 필독서였다. 제 날개를 감추고 제 깃털을 뽑아대면서 살았던 시간들이 시렸다.

 

실은 옛날 책 얘기를 하려는 것도, 지나온 삶을 얘기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시를 얘기하는 중이고 내 시론에 대해 쓰고 있는 중이다. 나는, 내 시의,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에 대해 쓰고 있는 중이다. 내 시의 자유와 내 시의 분출과 내 시의 비움을. 내 시의 착지와 발돋움과 그리고 비상의 삼박자를 그려보는 중이다.

오래 에둘러왔다. 늘 그렇듯 올 것은 오고 들 것은 들고야 마는 법.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을 다시 입안에 굴려본다. 되뇌며 열여섯의 나를 불러내는 중이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정끝별 시인 인터뷰

 

 

 

정끝별(鄭끝별) | 약력: 1988문학사상등단,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시집 『와락』 『은는이가』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등. 유심작품상, 소월시문학상, 청마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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